부처간 도입방식 이견... 의사회, 주총 권함 이임 여부
지난 2004년 4월 15일, 서울 서린동 SK그룹 본사에는 최태원 회장을 비롯한 경영 수뇌진 등이 총출동한 비상대책회의가 열렸다. 소버린자산운용이 SK㈜지분 8.6% 확보하면서 “SK㈜의 현 경영진과 협력해 지배구조 개선하겠다" 발표하며 경영참여를 선언했기 때문이다. 당시 최태원 회장은 SK㈜의 지분을 고작 0.72%만 소유한 상태라 소버린의 적대적M&A에 사실상 무방비 상태였다.
소버린은 추가로 SK㈜ 지분 14.99% 확보한 뒤 ‘최태원 회장의 사퇴’를 공식 요구하며 SK그룹을 압박했다. 이때부터 소버린과 최태원 회장 간의 경영권 확보를 위한 지분경쟁이 본격화됐다. 소버린이 보유주식을 팔고 시장에서 발을 뺀 2005년 말까지 최태원 회장이 개인적으로 경영권 확보를 위해 추가로 사들인 SK㈜ 주식은 총 25만3648주에 이른다. 금액으로 따지면 133억 원이 넘는 막대한 금액이었다. 반면 이 기간 동안 소버린이 SK㈜를 통해 벌어들인 수익은 총 8041억원(배당금 포함)에 달한다.
SK그룹 관계자는 “경영권 방어 치중하다보니 그룹의 주요 현안 사업에 대한 투자를 제대로 진행하지 못한 게 사실”이라며 “당시 만해도 적대적M&A 시도에 맞설 안전장치가 전무했다”고 말했다.
정부가 2일 기업의 투자 의욕을 북돋워주기 위한 지원책을 내놓으면서 포이즌 필(poison pill)` 제도 도입을 포함시켰다. 일각에선 경영권 방어 수단이 확대되면서 자칫 M&A 시장이 침체될 수도 있다거나, 재벌총수 경영권을 보장해주는 게 투자활성화가 무슨 상관이냐며 비판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하지만 수 있는 전문가들의 대부분은 정부의 포이즌 필 도입을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 이필상 민간금융위원회 위원장은 “적대적 M&A에 대해 국내 기업들은 신주의 제 3자 배정, 자사주 매입 등으로 방어하고 있는데 이는 비용이 너무 많이 든다”며 “투자를 통해 사회적 선순환을 일으킬 수 있는 기업 여유자금이 경영권 방어를 위해 불필요하게 쓰이는 셈”이라고 지적했다.
적대적 인수ㆍ합병(M&A) 위협을 받는 기업이 기존 주주들에게 신주를 저가로 발행할 수 있도록 하는 포이즌 필이 도입된다면 SK와 소버린 간의 소모적인 지분경쟁도 필요 없고, 막대한 시세차익을 노리며 시장을 흔드는 세력도 견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기업도 적대적 M&A을 방어하기 위한 부담감에서 한 발자국 물러나 여유자금을 설비나 R&D에 투자할 수 있다.
◆ 국내 기업 경영권 방어 비용 너무 많아..투자 걸림돌
실제로 법무부에 따르면 국내 상장회사들이 경영권 방어를 위해 자사주를 매입하는 데만 해마다 4조~7조원 자금을 투입되는데 포이즌 필을 도입에 절반만이라도 투자로 돌린다면 일자리 창출과 경제회복에 적지 않은 효과를 볼 수 있다.
정부가 M&A시장을 위축시키고 기업의 모럴 해저드를 야기하는 역기능을 충분히 예상하고도 포이즌 필을 도입을 강행 한 것은 투자촉진 등과 같은 긍정적인 측면을 더 중요하다고 봤기 때문이다.
전국경제인연합회에 따르면 국내 기업들의 현금성 자산은 1997년부터 10년간 약 2.4배 증가했다. 반면 일본은 같은 기간 오히려 2.1% 감소했다. 이는 투자는 점차 줄고 여유자금만 잔뜩 쌓아 놓는다는 의미가 된다.
포이즌 필 도입에 앞서 현재 관계부처간 테스크포스를 구성해 논의를 진행하고 있다. 구본진 기획재정부 정잭조정국장은 “포이즌 필 외에도 다른 경영권 방어수단의 도입 방안을 마련해 내년에 법제화가 가능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 포이즌 필 권한 이사회 냐, 주주총회냐 논란
포이즌 필이 가시화되면서 도입방식에 대한 논란도 일고 있다. 포이즌 필 권한을 이사회 혹은 주주총회에 주느냐에 따라 완전히 달라지기 때문이다. 이사회에 권한을 줄 경우 적대적인 M&A가 시도될 경우 즉각적인 의사결정이 이뤄져 적시에 경영권 방어에 돌입할 수 있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반면 남용될 수 있는 부작용도 있다.
미국은 포이즌 필 행사는 전적으로 이사회 권한으로 되어 있지만 일본은 이사회가 포이즌 필 행사 권한을 가지되 주주총회를 통해 승인을 받도록 행정지침을 내려놓고 있다. 신석훈 한국경제연구원은 “우리나라의 경우 오너경영 특성상 일본처럼 사후 이사회 승인여부를 판단하는 방식이 적절할 것 같다”고 지적했다.
포이즌 필은 사실 이명박 대통령의 공약사항이다. 이 대통령은 대기업 규제의 3대 핵심이었던 출자총액제한제도를 폐지하고 금산분리를 완화한데 이어 포이즌 필을 도입함으로써 경영권 관련 규제의 전봇대를 완전히 뽑아 버리게 된 것이다.
이규성 기자 bobo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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