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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시비비] 갈등을 넘어, 시대를 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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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못 안에 있어야 할 물이 연못 밑에 있다. '주역'의 47번째 곤(困) 괘를 두고 하는 말이다. 무슨 말일까? 연못 안에 물이 없으니 이상하고 혼란스럽고 곤궁하다는 말이다. 일본의 무역 보복과 관련, 지금 한국이 처한 형상이다.


우선 세계무역기구(WTO) 풍년. 일본 경제산업성은 지난달 26일 '2019년판 불공정무역신고서'에서 산업은행의 대우조선 자금 지원을 문제로 삼으며 한국 조선업을 WTO에 제소할 것을 시사했다. 한국은 일본의 무역 보복 조치를 적절한 시기에 WTO에 제소하려 한다. 지난달 23~24일 열린 WTO 일반이사회에서 한국과 일본은 일본의 무역 보복 조치에 대해 설전을 벌였다. 국제 여론과 국제통상법의 차원에서 WTO를 활용하는 것은 바람직하다. 하지만 이미 WTO는 지는 해다. 피해를 입은 나라가 의지할 수 있는 WTO 분쟁 해결 절차마저 올 연말 기능을 상실할지 모른다. 미국의 반대로 올 연말이면 상소기구 위원이 1명만 남게 되기 때문이다. 일본을 난처하게 만들었다는 최근 WTO 일반이사회 회의록(요약본)은 우리의 설전에 대해 단 한 줄로 요약한다. '의장은 양국이 우호적인 양자협의를 통해 해결책을 찾기를 기대한다.'

무슨 말인가? WTO를 활용해야 하지만 일본의 무역 보복에 대한 근본적 해결책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미국의 중재? 이 와중에 한국과 일본을 동시 방문한 미국의 존 볼턴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보좌관은 호르무즈해협 파병 문제와 방위비 분담에 깊은(?) 관심을 표했다. 일본을 비판하는 중국? 아직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ㆍ사드) 문제도 해결되지 않았다. 우리 영공을 드나드는 러시아? 그럴 리가. 그러니 우리가 의지할 수 있는 국가 혹은 단체는 사실상 없다. 조만간 일본 화이트리스트(안보상 수출심사 우대국)에서 한국이 제외되면 일본은 수출 허가를 통해 한국을 쥐고 흔들 수 있다. 다 안다. 대우조선에 대한 보조금이 문제가 되고 일본이 반대하면 현대중공업의 대우조선 인수는 무산된다. 글로벌 공급망뿐 아니라 우리 산업 정책에 대한 개입까지 시작된다. 그러니 이건 무역 보복이 아니라 경제 전쟁으로 넘어간다. 극적인 반전이 있을 수도 있다. 이낙연 국무총리를 통해서건, 한일 의원 간 협의를 통해서건, 기대하지 않았던 미국의 중재를 통해서건 혹은 민간 경제인 교류를 통해서건 피해가 가시화되기 전에 극적으로 해결될 수도 있다.


하지만 정말 궁금하다. 이 경제전쟁 이후의 시대에 우리는 어떻게 변해 있을까? 이번 일을 계기로 한반도 강점의 불법성을 인정하지 않는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 시대가 종막을 고할 수 있을까?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연구개발(R&D)과 소재ㆍ부품 개발에 기꺼이 동참하는 산업 구조가 만들어질 수 있을까? 고질적인 해외 지향적 경제 체질이 한반도를 중심으로 한 내수 지향형 경제로 변할 수 있을까? 무엇보다도 이 경제 전쟁을 계기로 어처구니없는 내부 총질 대신 무시무시한 트라우마를 치유하는 데 다 함께 힘을 합칠 수 있을까?


'주역'의 곤 괘는 말한다. '곤궁하면 형통(亨)한다. 올바른(貞) 길을 갈 때 대인(大人)은 길(吉)하다.' 총칼 없는 전쟁이라도 희생자는 나오고 상처는 생긴다. 그럴 때라도 올바른 길, 갈등을 넘어 미래를 향해 나 있는 길을 가야 한다. 그게 대인의 품격이다. 반으로 나뉜 한반도를 극복하는 그날, 투정 부리는 못난 동생을 껴안고, 최소한 한반도가 하나의 시장이 돼 스스로 생산하고 소비할 수 있는 그날, 그래서 일본과 같은 해외의 트집에도 끄떡없는 경제가 되는 그날, 바로 그날이 일제 강점의 불법성을 이기는 날이다. 그러니 곤(困)하나 희망이 있다.

김기홍 부산대 경제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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