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이현우 기자]남자들이 군대에 가면 흔히 들을 수 있는 속어로 '고문관'이란 단어가 있다. 고문관이란 아무리 설명해도 지시사항을 제대로 숙지하지 못하고, 각종 사고를 치는 병사를 가리키는 군대 은어로 쓰인다. 그래서 흔히 사람들을 정신적으로 고문한다고 해서 고문관으로 알려져있으며, 군대 뿐만 아니라 회사에서도 많이 쓰이는 용어가 됐다.
오늘날 사용하는 고문관의 의미는 이 미군 군사고문관들에게서 온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미군 고문단들은 한국이란 나라 자체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이 오다 보니 말도 잘 안 통하고, 현지실정을 잘 몰랐다고 한다. 또한 주로 2차 대전 당시 일본군 장교로 근무하거나, 만주와 중국 등지에서 독립운동에 참여했던 한국군 장교들과도 전술교리나 훈련방식 등을 놓고 의견차이가 발생해 충돌하는 경우도 있던 것으로 알려져있다. 이후 '고문관'은 말이 잘 안 통하는 답답한 사람을 의미하는 말로 굳어졌다고 한다.
1937년 8월부터 11월까지 당시 중국 국민당 군대와 일본군은 상하이를 놓고 3개월에 걸친 대혈전을 벌였다. 쌍방간 100만명 이상의 대병력이 투입된 이 전투에서 팔켄하우젠 장군은 상하이부터 난징까지 강력한 방어진지를 구축하는데 힘썼으며, 독일제 대포와 소총 등으로 중국군의 무장을 도왔다. 중국군은 일본군을 상대로 큰 피해를 입혔고, 일본은 예상보다 엄청난 피해를 입고 상하이를 점령하며 중일전쟁 초반의 기세가 크게 꺾이게 됐다. 중일전쟁이 장기항전으로 가면서 지연전으로 갈 수 있는데 큰 토대가 됐던 것.
이에 일본은 독일 측에 팔켄하우젠을 비롯한 독일 고문들을 중국에서 철수시킬 것을 요청했고, 독일정부는 일본과의 관계를 고려해 송환을 결정했다. 팔켄하우젠 장군은 더 남을 것을 희망했으나, 본국의 송환령에 응할 수밖에 없었으며 결국 1938년, 고국으로 돌아가 2차대전의 서부전선에 참전하게 된다. 그는 전후 나치 전범으로 재판을 받고 12년형을 선고 받았으나 곧 석방됐으며, 1958년에는 대만 정부가 그에게 감사 훈장을 수여하기도 했다.
이보다 앞선 19세기말에는 중국 청나라를 비롯해 아시아 각국이 근대식 무기체계를 받아들이면서 많은 군사고문단들이 초청돼왔고, 군사교관들도 많이 파견되곤 했다. 우리나라는 아관파천 이후 러시아정부에서 1896년부터 1897년까지 두차례 군사교관단이 파견된 바 있다. 러시아 군사교관은 당시 고종이 창설한 대한제국군 친위대를 훈련시켰고, 수비와 사격훈련 등 기본훈련과정 등을 수행했다. 이들이 남긴 당시의 물가, 생활상, 사진 등은 구한말의 민중 생활상을 파악하는데 중요한 자료로 쓰이고 있다.
이현우 기자 knos84@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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