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걷기를 중단하고 빙설가게에 들러 차가운 음료로 발그레하게 상기된 얼굴을 식히는 시간을 가졌다. 이후 코스를 바꾸어 인사동 쌈지길 상가건물로 향했다. 그제서야 얼굴에 웃음이 돌아온다. "바로 우리가 찾던 곳이에요!" 층층이 알록달록한 디자인과 함께 정신줄 놓게 만드는 시끄러운 공간이다.
얼마 전에도 도장 때문에 이 거리를 다녀왔다. 그동안 사용하던 한글도장이 너무 닳아버린 까닭에 은행에 비치해 둔 인주를 먹여도 글자가 뭉개져 제대로 찍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니 저 녀석들과 비슷한 나이일 때 손재주 있는 같은 반 급우가 한글로 새겨준 푸른 플라스틱 도장이다. 그런데 세상에 하나 뿐인 오랜 연륜의 수제도장이 수명을 다한 것이다. 신문에 자주 광고를 내는 세종문화회관 근처의 유명한 도장가게로 갈까. 아니면 주간지 기사에서 봤던 숨어있는 장인이 새긴다는 을지로 가게로 갈까. 이런저런 망설임 속에서 시간만 보냈다.
그 날 인사동 길을 따라서 숙소로 오다가 지인을 만났다. 방문한 가게 안에서 유리창 너머 필자가 지나가는 것을 보고서 반가움에 뛰어나온 것이다. 종로에서 머문 세월만큼 아는 이가 늘어나고 길에서 마주치는 사람도 그만큼 많아졌다. 안내 하는 대로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붓과 벼루만 파는 곳인 줄 알았더니 그것이 전부가 아니였다. 스탠드 불빛아래 부지런히 능숙한 칼놀림으로 의전용 낙관을 파고 있는 주인장의 포스가 한눈에 들어온다. 외국 유명 정치인들의 방문사진과 그들이 새겨간 도장까지 광고삼아 붙여 놓았다. 진짜 실력자라고 지인이 추임새를 넣는다. 그렇잖아도 도장포를 찾고 있었다고 맞장구를 쳤다.
이제 도장 대신 사인으로 대부분의 서류가 해결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 게다가 인터넷 뱅킹의 대중화로 인해 도장은 고사하고 은행에 갈 일조차 없어진 사람도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장은 여전히 또 다른 권위로 나름의 영역을 고수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가벼운 디자인과 부담 없는 가격으로 젊은이까지 끌어들이는 변신을 거듭했다.
인사동에도 많은 각수(刻手)들이 골목골목 포진하며 활약 중이다. 전통가게와 현대식 쌈지길 상가가 공존하면서 양 세대를 이어주고 전통형 도장과 새로운 감각의 도장이 또 다른 모습으로 구세대와 신세대를 연결하고 있다. 고딩들 덕분에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합성어라는 '디지로그'가 어우러지는 인사동의 새로운 모습을 만나게 된 것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 아니 경험한 만큼 보인다.
원철 스님 조계종 포교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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