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 아래에는 이미 많은 댓글이 달려 있었다. ‘고맙다’, ‘감동적이다’, ‘(짧지 않은 영상을) 끝까지 응원하며 보았다’는 것들이고, 구조자들을 영웅이라 부르기도 했다. ‘그깟 개 한 마리 구하느라 여러 사람이 고생하냐’ 류의 댓글은 찾을 수 없었다.
앞서 개 한 마리를 구해낸 영상처럼 이런 영화들은 감동을 자아낸다.이 감동의 정체는무엇일까.인간의 이성적 논리와 합리적 사고로 판단하자면, 결코 현명하지 않은 결정과 행위들이다. 개 한 마리 때문에 가던 길을 멈추고 장시간 고생을 자처하는 사람들, 가능성 희박한 힘든 구조를 위해 다수가 목숨을 걸고, 시신(오래 전 생명이 종료된)을 찾고자 산 사람들이 죽음의 고지로 향하는 결심과 행위들.
여기서의 감동들은 또 하나의추상적 단어를 뇌수에 띄운다.‘참으로 숭고한 것은 자연이 아니라 초자연적인 도덕성이며…숭고의 감정은 도덕적 감정을 전제로 한다’라던 칸트의‘숭고’일지 모른다. 그러나, 언어와 문화, 시대가 다른 철학자의 ‘숭고’는 철학자들에게 양보하고,우리가 아는 그 ‘숭고’를 윤곽하고 싶다. 앞서 예가 된 상황들에서 공통점은 숭고의 중요한 특징이된다. 숭고한결심과 행위들은 ‘효율’을 처절히 배반한다는 것.
이 와중에,인간의 이성적 논리를 능가하고 합리적으로 행동하는 기계(AI)마저 급속히 인간의 자리를 위협하고 있다. 영화 ‘HER’ 속 ‘그녀’처럼 인간의 필요에 의해, 인공지능이 ‘감성과 공감’을 흉내내고 시늉할 수는 있다. 그렇지만, 태생이 효율인 AI에게 ‘비효율’의 극치인‘숭고’를 학습시킬 산업적 Needs(필요)는 좀처럼 생겨나지 않을 것이다. ‘숭고한 행위’가 AI 관점에선 명백한 오류가 될 테다.
AI에게 이성적 논리와 합리적 결정을 양보해야 하는 세상에서 인간의 진정한 ‘경쟁력’은 무엇인가? 인간이 마지막까지 부여잡고 지켜내야 할 능력은 무엇인가?
효율과 정밀을 무참히 짓밟는 오차와 오류 속에 무한함이 내재된 매혹과 감동이 인간에게는 있다.
김소애(한량과 낭인 사이 人)