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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동여담]막걸리와 좋은 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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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종(酒種)은 가리지 않습니다." 어쩌다 저녁 자리에서 어떤 술을 좋아하냐고 상대방이 묻는 경우 곧잘 하는 답이었다. 제법 주당인 양 호방하게 보이고 싶어서다. 그러면 대개는 소주나 맥주를 시키기 마련이지만 사실 가장 선호하는 술은 막걸리다. 막걸리를 마시자면 왠지 비라도 내려야 할 거 같고, 파전이라도 부쳐야 어울리겠는 생각이 언뜻 든다. 하지만 종종 찾다 보니 막걸리만큼 아무 것에나 잘 어울리는 술이 있을까 싶었다. 본디 곡기를 대신하는 술이다 보니 그저 반찬만으로도 만족스러운 술상을 차릴 수 있었고 과해도 다음날 속이 부대끼는 일이 적었기 때문이다.

막걸리의 다양한 종류에도 관심이 생겨 여행을 가면 그 지역의 막걸리를 늘 경험하곤 했다. 그렇다고 각 지역 양조장을 꿰고 그 특징과 맛을 구분할 수준에는 미치지는 못한다. 막걸리 전문점에서 짐짓 다 안다는 듯이 "송막 주세요" 하는 정도다.
송막은 전라북도 정읍의 한 양조장에서 만드는 막걸리 이름을 줄여 부르는 말이다. 감미료가 전혀 들어가지 않아 깨끗한 맛이 특징이다. 막걸리계의 평양냉면이랄까. 하지만 서울서 취급하는 곳은 드물고 있더라도 가게에서 주문하면 가격이 제법 나간다. 막걸리는 자고로 벌컥벌컥 마셔야 한다고 배웠는데 더 시키고 싶어도 계산하는 사람 눈치가 여간 보이는 것이 아니었다. 결국 제대로 맛을 보기 위해선 양조장에서 직접 주문해 먹어야겠다는 장한 생각에 이르게 됐다.

문제는 택배로 받아 볼 수 있는 최소 단위가 한 상자, 스무 병이라는 점이다. 한 병에 900㎖, 생막걸리니까 10일 안에 먹어야 한다. 잔치라도 벌일 생각이 아니라면 엄두가 나지 않는 양이다. 하지만 삶은 늘 잔치 같아야 하니까. 머뭇거리다 어느 날 기어코 주문을 하고야 말았다.

냉장고 한 칸을 다 비우고 갓 만들어 배송된 생막걸리 스무 병을 차곡히 채우는 기분은 해 본 사람만 안다. 옛날 곳간에 쌀가마깨나 쌓아 본 부농의 마음이 이럴까. 바라만 봐도 든든해 자꾸 냉장고 문을 열게 된다. 그렇게 10여 일 동안 냉장고 문을 여닫으며 돼지고기를 삶고, 묵은 김치를 썰었다. 두릅을 데치고 감자전도 부쳐 가족들과, 친구, 선배, 후배들과 막걸리를 나눠 마셨다. 선물도 했고, 주말여행을 갈 때 들고 가기도 했다.
그러면서 막걸리는 더없이 좋은 소식을 전하는 술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양껏 시킬 수밖에 없어 여럿이 나눠야 해 더욱 돈독해지는 관계, 이런 것을 말 하는 게 아니다. 말 그대로 좋은 소식, 화장실 가고 싶을 때 "소식이 온다"고 말하는 바로 그 소식 얘기다. 잘 발효됐기 때문인지, 유산균이 워낙 많기 때문인지, 알 수 없지만 이 막걸리를 마신 다음날 화장실에 가 일을 보면 관장이라도 한 것처럼 속이 개운했다. 경험한 사람은 안다. 축복의 양은 체중이 감소한 것이 아닐까 우려될 정도였다.

올해 정월대보름을 맞아 '귀밝이술'로 막걸리를 주문한 것도 좋은 소식 때문이었다. 이번엔 울산에 있는 한 양조장에서 손으로 빚는다는 막걸리를 선택했다. 한 병에 요구르트 100병 분량의 유산균이 들어 있다는 말에 혹했다. 정월대보름의 귀밝이술은 귀가 밝아지라는, 그래서 한 해 동안 좋은 소식만을 들으라는 마음을 담고 있다고 한다. 마시면서 기원했다. 정말 올해는 좋은 소식만 듣기를, 숙변 같은 이 정국 깨끗이 내려 보내는 좋은 소식만 들을 수 있기를.





김철현 기자 kc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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