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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년전 묵정동에 창녀 140명 투입한 이토 히로부미

최종수정 2016.08.09 07:33 기사입력 2016.06.29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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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경성-서울 집창촌 빅리포트②]이 땅의 <화류(花柳)여지도>…유곽 창립… 연예기생 게이샤도 10명

당시 게이샤의 모습은 우키요에 비진가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사진 = 『간세이 세 미인(寬政三美人)』 중 <다카시마 오히사, 高島おひさ>, 기타가와 우타마로, 종이에 목판인쇄,  25.6*37, 18세기, 도쿄 국립박물관

당시 게이샤의 모습은 우키요에 비진가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사진 = 『간세이 세 미인(寬政三美人)』 중 <다카시마 오히사, 高島おひさ>, 기타가와 우타마로, 종이에 목판인쇄, 25.6*37, 18세기, 도쿄 국립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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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김희윤 작가] “천지에는 내 것이 없고, 만물은 각자 자기 자리에서 이치에 맞게 자라는데, 누가 덧없는 계급을 만들어서 귀천을 가리는가. 진실은 창부에게 있다.” - 히구치 이치요, <남은 서간> 중에서

일본 근대소설의 개척자로 꼽히는 작가 히구치 이치요는 여성으로서, 여성에 대한 당대의 편견에 대해 자신의 소설 캐릭터를 통해 쓴소리를 던졌던 독설가였다. 창부를 무시하고 천대하던 당대의 시선을 비웃는 그녀의 사고는 계급과 신분의 귀천을 넘어선 진실을 창부에게 안길만큼 진보적이었다. 당시 일본 사회를 주도하던 지식인들은 창부를 일컬어 ‘인비인(人非人, 사람이면서 사람이 아닌, 도리를 벗어난 사람)’이라 부르며 하대한 반면, 유곽산업은 전에 없던 호황을 누리며 그 영역을 확대해 나갔다.
일러스트 = 오성수 작가

일러스트 = 오성수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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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으로 창녀와의 밀당 배웠던 무사들

일찍이 공창제도가 발달했던 일본의 유곽문화는 무사들이 나라를 지배하던 막부정치를 거치면서 음식과 술, 그리고 여자(유녀)가 함께하는 형태로 진화했다. 도시 외곽에 집창촌을 구성하는 형태는 중국 당나라의 장안에 있던 것을 모방하면서 시작됐는데, 창부와의 연애에서 밀당을 가르치는 책 (시키도 쇼와케 나니와도라, 色道諸分難波鉦)이나 각 유곽에 있는 창부의 품평을 엮은 책(유녀평판기, 遊女評判記)이 유행할 만큼 매춘문화가 하나의 ‘풍속’으로 자리 잡았다.

일본은 주둔군의 위락을 위해 일본인 거류지에 대형 유곽을 설립한다. 사진 = 신정유곽 거리, 사진으로 보는 서울 제공

일본은 주둔군의 위락을 위해 일본인 거류지에 대형 유곽을 설립한다. 사진 = 신정유곽 거리, 사진으로 보는 서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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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의 유입과 신정유곽의 설립
갑오개혁 1년 전인 1894년, 청일전쟁을 기점으로 조선 땅에 들어온 일본군의 수는 점차 늘어갔으나 조선에는 음식과 술, 그리고 창부를 함께 제공하는 문화가 없었다. 군인들의 피로를 해소할 창구가 필요하다 판단했던 재조선 일본 거류민회는 1904년, 일본인 집단 거주지역의 외곽인 신마치(현재의 중구 묵정동)에 대규모 유곽을 건설했다. 토지의 구입에서부터 설립까지 일사천리로 진행된 유곽건설의 배후엔 당시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가 있었다.

1896년 한성에 거주한 일본인 1,749명 중 여성은 총 730명이었으며, 이들 중 140명이 유녀(창부), 10명이 예기(게이샤)였다. 이러던 것이 본격적인 유곽(신정유곽)이 설립되면서 조선으로 들어온 일본 유녀의 수가 급증하기 시작했고, 청일전쟁에 이어 1905년 러일전쟁에서도 승리한 일본은 사실상 조선을 식민통치하게 되면서, 기존의 재조일본인들의 조선에 대한 인식이 ‘잠시 머무는 단기 체류지’에서 ‘새로운 장기 생활거주지’로 전환되었다.

일본이 강제점령하고 있던 지역에는 어김없이 가라유키상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사진은 베트남 통킹 지역에서 활동하던 가라유키상들.

일본이 강제점령하고 있던 지역에는 어김없이 가라유키상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사진은 베트남 통킹 지역에서 활동하던 가라유키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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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으로 원정(?) 온 그녀들, 가라유키상

개방적 성문화와 더불어 호전적인 기풍을 지녔던 일본인들은 기회의 땅 조선에서 새로운 미래를 꿈꿨지만, 한편으론 본국에서 누리던 생활과 비교할 때 점잖고 무취미한 조선의 문화에 답답증을 느꼈다. 그 유일한 해방구가 유곽이었고, 이내 신정유곽이나 혼마치의 요정들로는 그 수요를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에 이르렀다. 유곽산업을 통해 막대한 부를 쌓아 올리던 일본 거류민회는 이 같은 변화를 감지하고 즉시 도성 바깥, 당시 용산 지역에 도산유곽 (현재의 마포구 도화동)을 설립하는데, 당시 일본 군사주둔지가 용산에 있으므로 그 수요가 더욱 늘어나 유곽의 수 또한 급속도로 늘어났다.

일본인은 본국을 ‘내지’, 조선을 ‘외지’라 칭하며, 해외로 돈벌이 나간 사람을 중국을 뜻하는 ‘가라(唐)’와 가다 란 뜻의 유키(きさん)를 합쳐 가라유키상이라 불렀는데 나중엔 해외에 나가 성을 팔았던 일본인 창부를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원조(?) 원정녀인 이들은 조선뿐만 아니라 유럽이나 미국 군대가 주둔해 있던 중국, 홍콩, 필리핀, 타이, 인도네시아, 멀리는 하와이, 아프리카까지 파견되었다.

일본인들의 유흥을 위해 설립된 유곽들은 주로 일본인 거류지 인근인 명동, 용산 인근에 생겨났다. 조선인의 전통적 유흥이 이뤄지던 요릿집들은 종로를 중심으로 설립됐고, 이곳으로 불려다닌 기생들의 이동편의를 위해 권번들 역시 종로 초입에 자리잡았다. 일러스트 = 이진경 디자이너

일본인들의 유흥을 위해 설립된 유곽들은 주로 일본인 거류지 인근인 명동, 용산 인근에 생겨났다. 조선인의 전통적 유흥이 이뤄지던 요릿집들은 종로를 중심으로 설립됐고, 이곳으로 불려다닌 기생들의 이동편의를 위해 권번들 역시 종로 초입에 자리잡았다. 일러스트 = 이진경 디자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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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곽 손님의 평가, “제 점수는요”

앞서 언급한 ‘유녀평판’의 풍속은 재조일본인 유녀들에게도 예외는 아니어서, 많은 자료가 남아있다. 그 중 한 책인 조선급만주의 한 대목을 보면 유녀들을 대하는 당시 일본인들의 세밀한 시선과 가라유키상의 기예 수준에 대한 불만을 느낄 수 있다.

“올 봄 경성의 예기들이 공연을 하였는데, 이것도 하루 보고 나서 진심으로 눈물을 흘렸다. 그들의 너무나도 볼품없는 연기를 보고 안타깝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미숙한 예능을 가지고 무대에 올라 창피를 당해야만 했는가를 생각하면 정말이지 눈물이 넘쳐흘렀다. (...) 경성의 예기는 샤미센보다는 베개를 들고 방으로 향하는 것에 더 익숙하고 좋아하며, 따라서 귀찮은 샤미센이나 노래 등을 연습할 필요는 없다. 춤 연습을 할 시간에 피임법에 대해 연구하는 편이 더 긴요한 것이다.” - 『경성예기하락상』, 조선급만주 제55호, 1912. 7. 15.

사진 = 명월관 정원에서 포즈를 취하는 기생들 모습

사진 = 명월관 정원에서 포즈를 취하는 기생들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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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기생은 요릿집에서

일본인 유녀는 유곽에서 만날 수 있었지만, 조선 기생을 만나려면 요릿집을 가야 했다. 을사늑약 이후 직업을 잃은 궁중의 연회담당 숙수(연회 때 음식을 만드는 사람)들은 대령숙수 안순환의 주도로 1903년, 종로통 네거리에 세워진 명월관에 집결했다. 왕에게만 진상되던 최고의 궁중요리를 맛볼 수 있는 데다 역시 왕조의 몰락으로 직업을 잃은 관기들의 기예를 함께 관람할 수 있다는 소문에 당대의 세도가들이 명월관으로 모여들었고, 그 뒤를 이어 국일관, 개진정, 화월루, 식도원 등의 요릿집이 차례로 개점해 성황을 이뤘다.

관기제도 폐지 이후 소속을 잃은 기생들은 자신들을 창기와 구별 짓기 위해 일패, 이패, 삼패로 등급을 나누고, 출신지역에 따라 조합을 설립하여 다동기생조합 (이후 대정권번)과 광교기생조합 (이후 한성권번) 등이 등장했다. 지금으로 따지면 매니지먼트사의 역할을 했던 권번은 기생을 가르치고, 훈육하며 장성한 이후에는 연회의 소개를 맡으며 수익에서 일정 비율을 나누는 방식으로 기생을 관리했는데, 인기가 많은 기생은 하루에도 십여 개가 넘는 요릿집을 오가며 가무를 선보여야 했다. 그리고 이 때, 매매춘 또한 은밀하게 이뤄졌다.

'조선의 애인'이라 불리며 큰 인기를 누렸던 배우 신일선은 개인사적 불행으로 스스로 기생이 되었다. 사진 = 그녀가 출연한 영화 '청춘의 십자로' 스틸컷

'조선의 애인'이라 불리며 큰 인기를 누렸던 배우 신일선은 개인사적 불행으로 스스로 기생이 되었다. 사진 = 그녀가 출연한 영화 '청춘의 십자로'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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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생활의 고충

신분제가 혁파된 이후 천민으로 분류되던 기생도 자유의 몸이 되었으나, 관기제도가 없어지고 기예를 선보일 장소가 궁중에서 요릿집으로 전락하자 기생의 위상은 날로 추락해갔다. 이에 따라 그 진입장벽 또한 낮아지게 되었고, 생활을 위해 기생을 자처하는 여성들이 늘어갔다. 일제강점기 조선인의 애환을 다룬 나운규 감독의 영화 <아리랑>에서 영희 역을 맡아 당대 ‘조선의 애인’으로 떠오른 배우 신일선은 결혼실패와 생활고의 이유로 기생이 되었는데, 당시 기생의 수입과 생활상을 그녀의 인터뷰를 통해 일부나마 엿볼 수 있다.

“이 직업에 나서고 보니 제일 고통인 것이 옷에 돈이 많이 드는 것입니다. 가을, 봄철 찾아 구격이 맞게 옷을 하여 입어야 함은 물론 요즘 손님들이 스타일도 보고 의장평(衣裝評, 옷과 외모 평가)도 자꾸 하시니 서울 장안에 새로 유행한다는 화려한 옷감은 대개 몸에 걸치어 보아야 하게 되어요. 동무들이 다 상해나 동경식으로 최신식 옷차림을 차리는 터에 나만 옛 모습을 차리면 손님들이 돌아다나 보리까. 그러니 한 달에도 몇 번 새 옷을 장만하여야 한답니다. (...) 개성의 황진이, 평양의 계월향, 진주의 논개 같은 전설에 비하면 지금에 기생이란 한 직업인데, 그런 운치와 풍류를 가져 달라는 것이 무리지요. 돈 앞에선 상품으로 밖에 이 사회에서 더 인정해 주나요?”

이토 히로부미(사진 뒷 줄 가운데, 갓 쓴 남성)는 조선의 문화에 일본의 풍속을 교묘히 접목시켜 기예 중심의 밤문화를 매춘의 장으로 끌어내렸다. 조선과 일본 양국의 우호를 주장하며 초대 통감으로 부임했던 그는 한복을 입고 찍은 사진을 남겼을만큼 훗날 친일파가 되는 대신들과의 돈독한 관계 또한 유지해나갔다.

이토 히로부미(사진 뒷 줄 가운데, 갓 쓴 남성)는 조선의 문화에 일본의 풍속을 교묘히 접목시켜 기예 중심의 밤문화를 매춘의 장으로 끌어내렸다. 조선과 일본 양국의 우호를 주장하며 초대 통감으로 부임했던 그는 한복을 입고 찍은 사진을 남겼을만큼 훗날 친일파가 되는 대신들과의 돈독한 관계 또한 유지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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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조의 몰락에 따라 궁중의 대령숙수가 설립했고, 관기의 기예를 감상할 수 있었으나 명월관은 일본의 요정을 본뜬 공간이었다. 일제는 조선의 상류층을 회유하고 매수하기 위해 조선의 콘텐츠인 요리와 기생을 자신들의 방식인 요정문화와 접목시켜 술과 여자를 통해 대한제국 고위 관료들을 자신들의 편으로 끌어들였다.

일본인들이 그토록 지루하고 ‘무취미’하다고 느꼈을 만큼 점잖았던 한양의 밤문화는 왕조의 몰락과 일제의 교묘하고 집요한 침략으로 인해 서서히 퇴폐적이고 향락적인 문화로 변질되어 갔다. 광복 이후 미 군정이 들어와 1946년 5월 17일 ‘법령 70호, 부녀자의 매매 또는 매매계약금지령’을 발표하면서 일제와 함께 유입된 공창(유곽)문화는 공식적으로 해체되었다.


김희윤 작가 film4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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