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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경의 즐거움]김춘수의 '꽃'과 노자 도덕경(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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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지능과 분별이 발달해 두 음절로 된 말들이 나오기까지는 '한 글자의 시대'가 있었다고 한다. 음절을 이어서 얘기할 만큼 말이 발달하지 않았을 때, 인간은 대체 어떤 것에다 한 글자의 이름을 붙였을까.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자기 눈에 가장 먼저 보이는 것, 가장 급한 것, 가장 무서운 것, 가장 익숙한 것을 중심으로 네이밍을 했을 것이다.

눈에 보이는 것. /꽃, 풀, 땅, 물, 뫼, 들, 집, 개, 닭, 소. /가장 급한 것. /불, 물, 칼, 똥, 피. /가장 무서운 것. /해, 달, 별, 검(신). /가장 익숙한 것. /눈, 코, 입, 귀, 배, 손, 발, 등, 나, 너, 그, 년, 놈.
모두 한 글자들이다. 한 글자 낱말은 원시의 낱말이다. 김춘수 시인이 '꽃'을 택한 것은 그 원시성에 주목한 것이다. 원시인의 눈길로 꽃을 바라보았다. 맨 처음 그것을 꽃이라 호명하는 그 극적인 순간을 시로 길어올린 것이 꽃이란 작품이다.

노자의 '선건자(善建者)'는 제54장에 나오는 구절이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는 말은 노자의 '잘 세운 것은 뽑히지 않는다'는 말과 통한다. 김춘수가 '무엇이 되는 비밀'은 꽃을 꽃이라 불러주는 호명에 있다고 했으니, 우리도 누군가의 '불림'을 받아 어떤 존재계 속으로 들어오고 싶다는 얘기다. 노자가 잘 세웠다는 것은 '도(道)'로 네트워크가 되어 단단해졌다는 얘기이며 존재계 속에 들어왔다는 얘기다. 단단해지면 뽑히지 않는다. 김춘수가 무엇이 되고 싶은 것은 단단해지고 싶기 때문이다. 단단해지려면 호명을 받아야 하고 호명을 받아야 이름 없이 뽑혀나가는 존재가 되지 않는다.

개인으로 보자면 '집을 잘 세우는 것'으로 족하지만, 세상 전체로 보자면 '그것들이 잘 얽혀 꼭 포옹하는 것'이 된다. 이것이 선포자(善抱者)이다. 이 말을 김춘수는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로 표현했다.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라는 시인의 말을, 노자는 한마디로 불탈(不脫)이라고 표현했다. 그렇게 호명되고 소통되는 집단을 이뤘을 때, 혼자서 쓸쓸히 떨어져 나가 자취도 없이 사라지는 그런 비극은 없을 것이란 약속이다. 김춘수는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라고 말한 것을, 노자는 자기 방식대로 이렇게 설명했다. "죽었다고 해도 걱정하지 마세요. 자손들이 계속 제사를 지내줄 거예요."
노자가 말한 도덕경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도(道)는 조물주의 창조 시절에 존재하던 것인데, 분별이 생기고 이름 짓기 시작하면서 인간들이 그 진짜 면모에 접근하기가 어려워졌다. 그래서 노자인 나는 권유하건대, 인간이 이뤄놨다고 하는 잔머리를 내려놓고, 태초에 조물주가 만물을 낳는 방식을 인간의 삶에 응용하던 원시적 지혜를 되살려 겸손하고 소박하게 만사에 임하라>는 가르침이라고 생각한다. 도덕경의 문제의식은 이름에서 나왔고, 그 이름이 가려놓은 조물주의 진정한 뜻을 주목하라고 설파한다. 조물주의 진정한 뜻은 만물을 낳은 어머니 같은 끝없는 겸허의 모성이다.



빈섬 이상국(편집부장ㆍ시인) isomi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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