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스럽게 낫을 간 이유가 있다. 다음 날 벌초(伐草)를 위해 꼭 거쳐야 할 일이다. 오직 사람의 힘으로 수풀을 헤쳐나갔다. 전날 준비한 낫의 힘으로 길을 열었다. 드디어 잡초가 무성한 봉분(封墳)이 모습을 드러냈다. 수건 하나 목에 두르고 땀을 뻘뻘 흘리며 공간을 정리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1시간은 넘은 것 같다.
추석을 앞두고 해마다 시골집에서 경험했던 풍경이다. 내가, 아버지가, 할아버지가 그 윗분이 경험했던 일들이다. 내 아이도 시골 마당 가마솥을 데우는 장작불 냄새를, 낫을 갈고자 분주한 저녁 풍경을 경험할 수 있을까. 물론 지금 현실과는 동떨어진 얘기다.
시간은 흘렀고 세상은 변했다. 과거처럼 산을 헤매며 낫으로 길을 낼 이유는 없다. 낫의 칼날을 다듬을 이유도 없다. 강력한 기계음을 내는 '예초기' 하나면 준비 끝이다.
각자의 판단 기준은 다르니 뭐가 옳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다만 추석을 앞두고 해마다 고속도로가 주차장이 돼 버리는 것을 보면 아직 많은 사람이 '직접 벌초'를 선택하는 것으로 보인다. 때로는 비효율적인 선택이 효율 그 이상의 가치를 담는 경우도 있다. 1년에 한 번 예초기를 잡고 서투른 실력으로 벌초에 나서겠지만, 그 과정 자체도 의미는 있다.
자신의 오늘을 있게 한 뿌리를 확인하는 일은 효율성, 경제성의 잣대로만 판단하기는 어렵다. 내년에도 추석을 앞두고 다시 그곳을 찾아야겠다. 아버지가 걸었고 내가 걸었던 그 길을 아이가 다시 걷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 있는 일이다. 아이에게 어떤 기억으로 남을지 모르지만, 그 '기억의 보따리'가 가족의 의미를 되새기는 '인연의 끈' 아니겠나.
류정민 사회부 차장 jmryu@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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