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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동여담]벌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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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정민 사회부 차장

류정민 사회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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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쓱싹, 쓱싹….' 낫에 적당히 힘을 줘서 숫돌에 문지르는 작업을 반복했다. 칼날이 제법 매섭게 살아났다. 숫돌의 색깔은 검은색으로 물들었지만, 맑은 물을 2~3번 끼얹으면 그만이다. 숫돌 본래의 짙은 회색이 금방 되살아난다.

정성스럽게 낫을 간 이유가 있다. 다음 날 벌초(伐草)를 위해 꼭 거쳐야 할 일이다. 오직 사람의 힘으로 수풀을 헤쳐나갔다. 전날 준비한 낫의 힘으로 길을 열었다. 드디어 잡초가 무성한 봉분(封墳)이 모습을 드러냈다. 수건 하나 목에 두르고 땀을 뻘뻘 흘리며 공간을 정리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1시간은 넘은 것 같다.
잡초는 사라지고 봉분 주변은 시원하게 정돈됐다. 막걸리로 간단하게 차례(茶禮)를 올리고 돌아섰다. 몸은 녹초가 됐지만 마음만은 상쾌했다. 시골집 처마 너머 노을을 감상하며 구수한 된장찌개와 여러 나물, 고추장을 넣고 비벼서 먹는 저녁은 꿀맛 같았다.

추석을 앞두고 해마다 시골집에서 경험했던 풍경이다. 내가, 아버지가, 할아버지가 그 윗분이 경험했던 일들이다. 내 아이도 시골 마당 가마솥을 데우는 장작불 냄새를, 낫을 갈고자 분주한 저녁 풍경을 경험할 수 있을까. 물론 지금 현실과는 동떨어진 얘기다.

시간은 흘렀고 세상은 변했다. 과거처럼 산을 헤매며 낫으로 길을 낼 이유는 없다. 낫의 칼날을 다듬을 이유도 없다. 강력한 기계음을 내는 '예초기' 하나면 준비 끝이다.
과거보다 참 편리해졌다. 요즘은 편리함을 넘어 경제성을 따지는 시대다. 굳이 추석을 앞두고 길 막히는 고속도로를 뚫고 내려갈 이유가 있느냐는 현실론이 고개를 든다. 실제로 인터넷만 접속해도 '벌초 대행' 서비스를 알리는 광고가 쏟아진다. 자동차 기름값, 고속도로 요금소 비용, 식비와 기타 비용을 고려할 때 직접 벌초를 하기보다 외부에 맡기는 게 경제적일 수도 있겠다.

각자의 판단 기준은 다르니 뭐가 옳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다만 추석을 앞두고 해마다 고속도로가 주차장이 돼 버리는 것을 보면 아직 많은 사람이 '직접 벌초'를 선택하는 것으로 보인다. 때로는 비효율적인 선택이 효율 그 이상의 가치를 담는 경우도 있다. 1년에 한 번 예초기를 잡고 서투른 실력으로 벌초에 나서겠지만, 그 과정 자체도 의미는 있다.

자신의 오늘을 있게 한 뿌리를 확인하는 일은 효율성, 경제성의 잣대로만 판단하기는 어렵다. 내년에도 추석을 앞두고 다시 그곳을 찾아야겠다. 아버지가 걸었고 내가 걸었던 그 길을 아이가 다시 걷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 있는 일이다. 아이에게 어떤 기억으로 남을지 모르지만, 그 '기억의 보따리'가 가족의 의미를 되새기는 '인연의 끈' 아니겠나.





류정민 사회부 차장 jmryu@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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