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농 아들서 월가 거물이 되기까지
당시 증권회사의 객장에는 증권시세표시기를 통해 들어오는 주가를 고객들이 볼 수 있도록 기록하는 커다란 칠판이 있었는데, 그는 주가를 그 칠판에 기록하는 일을 담당했다. 장중 거래가 활발하게 이뤄지는 주식의 주가를 기록하며 숫자의 움직임을 연구하고 패턴을 찾아내려 했다. 컴퓨터 트레이딩시스템이나 할 수 있는 주가 패턴 정의나 수익률 통계를 10대 어린 꼬마의 손으로 시도한 것이다.
21살 때 보스턴에서 뉴욕 증권거래소(NSE)로 주 무대를 옮긴 뒤 1년 만에 전 재산을 잃게 됐다. 증권회사로 들어가 단 이틀 만에 2800달러를 벌어들이며 재기의 발판을 다지지만 얼마 지나지지 않아 공매도 실패가 이어지며 다시 빈털터리가 된다. 당시 고공행진하던 노던퍼시픽철도(NPR) 주식의 반락을 예견해 5만달러 어치 주식 전량을 공매도 친 것이 화근이었다. 이 공매도 주문과 청산체결 시간이 연속적으로 지연되면서 그는 5만달러를 모두 잃었다.
1907년 30살 때 기회가 찾아왔다. 샌프란시스코 대지진으로 인한 혼란과 영란은행의 금리 인상이 맞물리며 대폭락장이 왔을 때다. 그는 공매도로 단 며칠 만에 300만달러를 벌었다. 당시 리버모어의 공매도 파장은 시장의 방향을 좌지우지할 정도로 막강했다. JP모건이 공매도를 멈춰달라고 요청했다는 일화가 전해지면서 '월가의 큰곰'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이후 1929년 대공황 당시에도 시장 급락을 예견해 1억달러라는 천문학적 수익을 올렸다.
조유진 기자 tint@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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