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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진석의 책과 저자] 김문수 소설집 '비일본계(非日本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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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 망언에 분개해 써내려간 '조선 어부 안용복' 이야기

소설가 김문수

소설가 김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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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암사(靑巖寺)는 경상북도 김천에 있다. 증산면 평촌리, 불령산 북쪽 기슭이다. 신라 헌안왕 3년(859년)에 도선 스님이 창건했다고 한다. 비구니들이 수행하는 도량이다. 1985년 7월에 이곳에서 '창작교실'이 열렸다. 작가나 시인이 되려는 대학생들이 기성 문인을 초대해 작품을 합평하는 자리였다. 나는 소설을 가지고 참가했다. 노모를 모시는 일로 다툰 젊은 부부가 급한 일로 함께 지방에 내려가면서 갈등하고 화해하는 내용이었다. 대체로 좋은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눈이 부리부리한 소설가에게 혼쭐이 났다. 부부가 화해하는 장면에서 '포니'라는 승용차를 운전하던 남편이 아내를 품에 안는 대목이 나온다. 그는 이 대목이 "음탕하다"고 비판했다. 그 소설가는 2012년에 세상을 떠난 김문수다.

대학생이 되었을 때 학교 도서관에서 빌려 읽은 김문수의 작품 가운데 '증묘(蒸猫)'가 있다. '증묘'란 도둑을 잡거나 애정에 얽힌 누군가를 해코지하려는 일종의 저주 기속(奇俗)이다. 고양이에게 저주하려는 대상을 알려주고 산채로 솥에 가둬 삶으면 고양이의 원혼이 상대를 찾아가 화를 입힌다고 한다. 작품 속 주인공 '그'는 한국전쟁 당시 인민군 치하일 때 국군 소위인 삼촌이 숨은 곳을 적에게 알려 죽게 만든다. 그의 숙모는 증묘를 하며 남편을 앗아간 원수를 저주한다. '그'가 홀어머니를 잃고 고아가 되자 숙모가 거두어 상경한다. 그는 청년으로 자라면서 숙모와 동거한다. 잡지 기자로 일하는 친구가 장난삼아 '청춘 복덕방'이란 기사에 그를 좋은 신랑감으로 소개하자 많은 여자들이 그를 찾는다. 질투를 느낀 숙모는 또 증묘를 한다. "네가 이 지경이 되는 것은 우리 조카의 마음을 뺏은 여자 때문"이라며. 어느 날, 그는 젊은 여자와 길을 걷다 마주 오는 숙모를 발견하곤 맨홀 속에 숨는다. 그런데 근처 건물 공사판에서 던져대는 통나무들이 그 위를 덮어버린다.
나는 '증묘'를 읽고 대번에 어린 시절의 기억을 떠올렸다. 서울 중랑천 둑방 판자촌에 사는 친구를 만나고 돌아오던 길에 고양이 잡는 광경을 보았다. 고양이를 잡는 이유는 알지 못했다. 철사에 목을 졸린 채 허공에 매달려 발버둥치는 고양이를 두려운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나의 부모는 나에게 "고양이는 영물이니 해치면 안 된다"고 가르쳤다. 고양이는 죽음이 가까워지자 몸부림을 그쳤다. 반쯤 감은 눈으로 몰려든 구경꾼들을 하나하나 새기듯 둘러봤다. 나는 그 눈길과 마주칠까 두려워 황급히 달아났다. 걸음을 재촉해 집으로 돌아가는 동안 줄곧 고양이의 눈길이 떠오르면서 구역질이 났다. '창작교실'이 끝나 뒤풀이를 할 때 김문수에게 이 이야기를 했다. 그는 아무말없이 웃었다. '증묘'는 그의 대표작이었고, 만나는 사람마다 이 작품에 대해 이야기해 불편했다는 말을 나중에 들었다.

세상을 떠난 지 이태가 훨씬 지난 올해 김문수의 작품집이 나왔다고 해서 놀랐다. 정확히는 소설 선집이다. 책의 제목은 '비일본계(非日本界)'인데, 표제작은 소설가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발표한 중편 소설이다. '非日本界'란 일본의 지경이 아니니 곧 '조선지계(朝鮮之界)'라는 뜻이다. 조선의 어부 안용복이 대마도와 일본을 누비며 울릉도가 조선의 땅임을 역설하고 에도 막부의 관백으로부터 서계(공문서)까지 받아낸 사실(史實)이 소설의 뼈대이다. 김문수가 40여년 전 청계천의 헌책방에서 안용복에 대한 짧은 이야기를 발견하고 받은 충격이 이 소설을 쓴 계기다. 그는 '창작노트'에 적었다.

"처음 안용복 님을 알게 된 것은 40여 년 전 청계천 고서점에서다. 책 구경을 하다가 우연히 펼쳐 5분도 안 되는 시간에 다 읽은 짧은 얘기, 그러나 충격은 컸다. 소설로 쓰자! 자료를 찾았으나 용이치 않았다. 게다가 그 무렵 한호(寒戶)의 가장이 돼 밥 버는 일로 이리 뛰고 저리 닫다 보니 그만 안용복 님을 까맣게 잊고 말았다. 그러다 10여 년 전, 일본의 망언과 광언들이 그 잊었던 생각을 일깨웠다. 그래, 소설 '독도'를 쓴다! 사명감이 들끓었다. 그러던 중 이 작품을 쓸 기회를 얻었다. 소설 '독도'의 계획과는 다른."
김문수 소설집 '비일본계'

김문수 소설집 '비일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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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일본계'에는 다른 작품도 실렸다. 그의 대표작이라 할 만한 '만취당기'도 있다. 1989년 동인문학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김문수는 '유머와 위트 끝에 번뜩이는 진실의 비수와 같다'는 평을 들었다. 그의 작품에는 과장된 논리나, 아슬아슬한 극적 구성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문학평론가 송재영은 "사회적으로 소외되고 학대받는 사회적 약자들의 사실적인 이야기를 통해 '고귀한 가치를 가져야 할 휴머니티가 얼마나 열성적으로 타락하는가'를 해학적인 문체를 통해 들려준다"고 했다. 작품을 해설한 방민호는 "작가로서 김문수는 선의의 사람들이 공동체적 질서와 모럴을 지켜가며 만들어가는 세계를 지향했다. (중략) 작가는 다시 우리들 작은 인간들의 선의를 믿고 그것을 성원하는 존재로 돌아간다. 많은 작품들 속에서 그 작품들이 암시하는 작가의 존재는 순수하고도 따뜻한 인간적 존재"라고 썼다.

나는 2009년 가을 서울 다동에 있는 일본식 선술집에서 김문수를 마지막으로 만났다. 그에게 남은 시간이 그토록 짧으리라고 상상하지 못했다. 내가 옛날에 그에게서 들은 작품평에 대해 말하자 그는 빙긋이 웃으며 "글쎄, 내가 왜 그런 식으로 얘기했을까. 더 정확하게는 '이런 식으로 써버릇하면 나중엔 결국 음탕한 글을 쓰게 된다'는 경계가 아니었을까"하고 말했다. 나는 그의 말이 맞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때는 소설 쓰기를 그만두었기 때문에 별다른 감정이 없었다. 그 자리에는 시인 박제천도 있었다. 시인이 일하는 서울 동숭동 '문학아카데미'에 가서 김문수의 사진을 빌려왔다. 이번 주말에는 서점 몇 곳을 돌며 아직 서가에 꽂힌 그의 소설집을 사들일 생각이다. huhball@

<비일본계/김문수 지음/솔/1만3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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