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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시선]한식과 부활절 사이에서

최종수정 2014.04.10 11:20 기사입력 2014.04.10 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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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환학 서울대 행정연구소 특별연구원

김환학 서울대 행정연구소 특별연구원

하이델베르크에서 네카 강을 건너면 이른바 철학자의 길이라 불리는 산책로가 있다. 헤겔과 괴테가 이 길을 걸었다. 그 한쪽 편에 1600년대 하이델베르크 시가지를 (바로 그 자리에서) 그린 그림이 놓여 있다. 400년 전 그림 속의 하이델베르크는 강 건너에 펼쳐지는 지금의 시가지와 별반 다르지 않다. 그때나 지금이나 구역 구역마다 집들이 동서로, 남북으로 틀어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당시 하이델베르크에서는 영주가 루터의 종교개혁을 받아들이는 바람에 가톨릭과 오랜 기간 피를 부르는 갈등과 반목이 이어졌다. 30년 전쟁(1618~1648년)을 거치면서 구교도와 신교도의 갈등이 극에 달했고 집도 같은 방향으로 짓지 않았단다.

이 지독한 종파분쟁의 여파는 계속 이어진다. 독일의 존경받는 정치가 헬무트 슈미트가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 성당의 주일학교에 다닐 때를 회고한 적이 있다. 한 아이가 어떤 사람이 천국에 가고 어떤 사람이 지옥에 가느냐고 물었단다. 주일학교 선생은 어떤 사람이 천국에 가는지는 모르지만 이미 지옥에 가 있는 한 사람은 확실히 안다고 하며, 그 사람이 바로 마틴 루서라고 했다는 것이다. 독일의 가톨릭에서 여전히 마틴 루서가 번역한 성경을 쓰고 있으면서도 말이다.

하지만 독일 사람들은 종교와 종파를 둘러싼 가상의 적대적 공존에 매몰되지는 않는다. 누가 신교도이고 누가 가톨릭인지 모르면서 기독교에 관한 농담을 같이 즐긴다. 일요일에 신교와 가톨릭이 함께 참여하는 합동예배가 생중계되는데 연방수상도 같이 한다. 그들이 종교의 비합리성과 그 권위적 지배를 극복한 방도 중의 하나는 종교문화의 토착화로 보인다. 크리스마스트리가 좋은 예이다. 지금이야 트리가 연말의 상징이 되었지만 중세의 기독교는 트리를 장식하는 자를 화형까지 처했다. 생각해 보면, 예루살렘과 로마의 기후에 트리를 만들 침엽수가 어울리겠는가. 이는 북방 이교도의 풍습이었던 것이다. 유럽에서 12월에 트리가 반짝거리는 것은 기독교 토착화의 선언이다.

서구화된 기독교를 받아들인 우리나라에서는 토착화와 근대적 합리화의 두 가지 과제가 있다. 개신교의 흡연금지를 보자. 그 유래는 192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교회가 계몽적 역할을 담당했던 당시에야 계율로써 흡연을 금지하는 것을 이해할 수 있으나 21세기에까지 100년 전의 종교관계를 유지하려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다. 왜 금연을 강요해 신도들을 어린애 취급하는가. 믿음의 조상도 같고 예수를 통해야 구원받는다는 것도 같은데 제례문제나 여러 관계에서 이질적 계율과 도그마를 만들어 고착되면 종교문화는 낙후되다 못해 유치해진다. 종교인들은 자신들의 세속적 영역을 확보하기 위해 이러한 비이성적 상황을 이용하고 싶겠지만 유일배타적인 경향을 세상에서 실현하려는 사람들이 위험하다는 것은 북한에만 적용되지 않는다.

기독교인들은 성경으로 돌아가면 좋겠다. 히브리서 10장 1절은 "율법은 장차 올 좋은 일의 그림자일 뿐이요 참 형상이 아니다"라고 한다. 계율을 절대적으로 여기는 태도로는 불완전한 율법을 완전케 하려 한 청년 예수의 형상을 볼 수 없을 것이다. 이어서 히브리서 11장 1절에서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고 한다. 청년 예수가 바라는 것은 성경에 쓰여 있고, 나면 죽는 사람들이 바라는 것은 산소에서 성묘를 하면서 대를 이어 전해진다. 성경과 산소에 남겨진 것, 둘 다 보이지는 않으나 간절한 것이다. 기독교는 우선 전통제례와 화해하면 좋겠다. 같은 시공간에 사는 사람들의 문화적 자존심을 지켜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제 죽은 조상의 한식이 지나고, 예수의 부활절이 온다.
김환학 서울대 행정연구소 특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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