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창하게는 태어나 처음으로 본 세상의 모습(물론 기억하는 이가 드물겠지만)이라거나 죽음 이후 마주치는 첫 장면(이론상으론 가능하지만 글쎄 이 또한 증언해 줄 이가 마땅치 않으니, 거참…)같이 역사에 길이 남을 특종거리도 있겠으나, 내 경우 아주 소소한 것들이 두고두고 잊히지 않는다.
지금은 라면을 잘 먹지 않게 됐는데(식당에서 부대찌개나 김치찌개를 시켜 먹을 때도 라면사리는 절대 사절이다) 군대시절 질리게 먹어 댄 덕분이다. 남들이 평생 먹어도 남을 정도의 분량을 1년 사이에 해치웠다. 하루 세 끼는 물론이고 야식에 술안주까지 라면으로 해결한 날이 적지 않았다.(맛에 변화를 주기 위해 별 궁리를 다했는데, 물과 스프의 양을 이리저리 조절하는 건 기본이고 고추장을 풀거나 마늘 또는 풋고추를 잘게 썰어 넣은 라면까지 등장했을 정도다)
라면이 지겨워져 영영 결별한 지가 꽤 오래전인데 라면과의 첫 만남이 여전히 판타스틱하게 남아 있는 건 대체 어떤 연유일까. 논리적으로 납득이 안 되는 불가해한 현상이자 내 인생의 미스터리가 아닐 수 없다.
사람도 음식과 마찬가지여서 어떤 이는 세월에 썩어버리고, 어떤 이는 익어 가는 모양이다.
<치우(恥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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