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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 떠나는 전라도 여행[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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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금진 시인의 '화엄사' 기행<1>


각황전 석등 속으로 눈이 내린다

그 무렵 나는 남쪽으로 거처를 옮긴 지 얼마 되지 않았고, 나는 내 본적지인 ‘화순和順’ 어딘가를 자주 돌아다니고 있었다. 아는 사람 하나 없는 객지 생활이었지만 그렇게라도 한 곳에 마음을 주면 그래도 위안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화엄사는 그렇게 화순을 따라 흘러가다가 만난 곳이었다.
뭉클해지는 가슴의 틈에도 빛이 새어들고 있었다


화엄사를 처음 방문했을 때는 마침 눈이 내리던 저녁이었다. 산과 사찰이 하나의 거대한 어스름 속으로 잠기고 있었고 하늘과 땅이 똑같은 잿빛을 내어 서로를 향해 번지고 있었다. 모든 색을 섞어놓으면 검은색이 되듯, 살아있는 것, 잠드는 것, 우는 것, 웃는 것, 그 모두가 하나의 색을 뒤집어쓰고 조용히 명부전冥府殿에서 걸어 나오고 있었다. 화엄사의 어둠은 동쪽 명부전에서부터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 어둑해지는 틈을 헤치고 법당의 불빛이 환하게 각황전覺皇殿 마당을 비추고 있었다.

그리고 작고 가벼운 눈송이들이 날아다녔다. 눈송이들은 모두 하얀 수의를 입고 있었다. 어두워지고 있던 대지와 하늘은 그 순간 어떤 작은 틈을 눈송이들에게 열어주고 있었다. 어린 눈송이들은 그러나 길을 찾지 못하고 자꾸 아래로 가라앉았다. 잠시 떠오르곤 하다가 잠시 옆으로 옆으로 길을 내곤 이내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그 좁은 틈을 따라 눈송이들이 여리고 여린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나는 꿈을 꾸고 있는 듯했다. 내 사주에 들었다는 역마살처럼 눈송이들이 헤매고 있었다.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끝도 모를 어둠이 눈송이를 올라타고 내리고 있었다. 눈송이들은 얼굴과 손에 닿자마자 녹았다. 아팠다. 살아있는 것들은 밝음과 어둠의 짧은 찰나를 날고 있는 것이며, 그것을 마주보는 것은 아픔이었다. 바로 그때 각황전 앞 거대한 석등에 환하게 불이 켜졌다. 뜨겁지 않은 커다란 횃불이었다. 내리던 눈송이들이 석등의 불빛을 향해 모여들었다. 눈송이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숙이고 축축하게 젖은 머리카락을 쓸면서 눈송이들이 그리로 걸어 들어가고 있었다. 명부전 마룻장에 앉아 있던 배고픈 귀신들도 일어나 석등 주위로 모여 들었다. 아는 사람들의 얼굴도 몇 보였다. 할아버지와 할머니, 아버지가 보였다. 손을 내밀어 보았으나 그들은 아무 말이 없었다. 석등의 불빛은 점점 더 넓게 동심원을 그리며 퍼져 나갔다. 주위를 돌아보니 화엄사 경내 곳곳에 불이 켜지고 있었다. 어둑해진 산속을 환하게 밝히고 있는 화엄사 그 자체가 하나의 커다란 등불이 되고 있었다. 나는 가슴이 뭉클했다.

그러나 그 뭉클해지는 가슴의 틈에도 빛이 새어들고 있었다. 인생의 모든 중요한 순간들조차 몇 개의 필름 같은 기억으로 남듯, 잊혀지지 않는 몇 개의 이미지들이 기억을 거느린다. 화엄사 각황전 앞 석등엔 실제로 불이 들어오지 않는다. 몇 번을 두고 방문해서 보았지만 불은 단 한 번도 켜지지 않았다. 물론 귀신이 사는 것도 아니다. 다만 그 저녁의 눈과 어둠이 내 속에 스며들면서 몇 개의 이미지들을 더 데리고 들어온 것이었다.

“석등에 왜 불을 켜지 않나요?”

화엄사를 찾는 방문객들이 호기심에 그렇게 물어보곤 하는 모양이다.
그러면 만월당(滿月堂) 대요(大了)스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실 것이다.

“불이 안 보이십니까? 불은 당신이 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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