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다루려고 하는 화가는 곽희가 아니라, 그보다 50년쯤 뒤에 태어난 이녕(李寧)이다. 이 땅의 화인(畵人)으로 가장 빼어난 세 봉우리를 꼽는다면, 신라의 솔거와 고려의 이녕, 그리고 조선의 안견이라고 말하는 이들이 있다. 솔거는 고대회화의 거장이요, 이녕은 중세를 주름잡은 천재화가이며, 안견은 이 땅의 근세회화로 나아가는 길을 닦은 대화가로 볼 수 있다. 우린 아쉽게도 3봉 중에서 2봉의 작품을 모두 잃어버렸다.
고려 예종은 송나라의 상인이 바친 그림 하나에 꽂혀 있었다. '천수사남문도(天壽寺南門圖)'였는데, 아마도 천수사는 송도(개성)의 동쪽에 있던 사찰로 숲이 우거졌으며 노래와 피리소리가 끊이지 않던 고려의 명소였다. 왕은 신하들을 불러 모아 이렇게 말했다. "짐이, 송인(宋人)에게서 큰 보물을 얻었노라. 북송 회화의 진면목을 들여다볼 수 있는 대단한 그림이로다." 이렇게 자랑했을 때 한 신하가 물었다. "전하. 어찌 송인이 고려의 사찰을 이토록 정미(精美)하게 그렸을까요. 놀랍습니다." 왕은 말했다. "그러니, 더욱 귀하지 않겠는가." 그때 화국에 근무하는 이녕이 문득 말했다. "그 그림은 제가 그린 것이옵니다." 왕이 깜짝 놀라 물었다. "송인에게서 산 것인데, 어찌 그럴 리가 있겠느냐." "그림 뒤에 배접된 비단을 뜯어보시면 제 이름과 제시(題詩)가 있을 것입니다."
곽희의 중국이 오히려 우러른, 글로벌한 고려화가 이녕은 어느샌가 잊혔고 작품도 사라졌으며 저 에피소드 속에 들어 있는 두 작품 예성강도와 천수사남문도의 이름만 남아 있다. 곽희가 그렸던 관념산수의 정수를 골수에 익힌 뒤, 그것을 실경(實景)에 적용해, 고려의 진경(眞景)을 얻어냈을 이녕의 그림들을 만나보지 못하는 이 허기를 어찌할 것인가. 겸재 정선이 일대 바람을 일으킨 조선 진경산수의 빼어난 선구(先驅)가 그의 붓끝에 있었음을 어찌 잊고 살 것인가.
빈섬 이상국 (편집부장·시인) isomi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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