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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의 발견]최북은 왜 금강산 표훈사를 그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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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북의 '표훈사'

최북의 '표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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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사람들이 헷갈릴까 싶어 그러는데, 나 최북은 겸재 정선(1676~1759)보다 30년쯤 뒤에 태어난 사람이고, 단원 김홍도(1745~1806)보다는 30년쯤 앞선 사람이라네. 겸재는 영조의 사랑을 받아 지방 수령 벼슬을 여러 차례 하는 광영을 누렸고, 단원은 정조의 총애를 받은 도화서 화원이네만, 나는 입에 풀칠을 늘 걱정해야 하는 그야말로 돈 없고 백 없는 그림쟁이였네. 부친이 떠돌이 화백이어서 그랬던지 그림엔 약간의 재능을 물려받아, 제대로 된 배움도 없이 중국서 흘러나온 화본(畵本)을 죽어라고 연습해서 겨우 붓눈을 뜬 사람이지.

술을 좋아한다는 거야 부인할 일이 아니지만, 취중의 행동에 대한 뭇사람들의 입방아와 촌평들은 가려들을 필요가 있네. 금강산 구룡연에서 대취하여 소(沼)에 뛰어들며 "천하의 명산에서 천하의 명사가 죽을 만하다"고 말했다는 소문도 그야말로 나를 희화화하여 심심파적하려는 우스개일 뿐이라네. 다만 구룡연의 물살을 바라보다 마음이 크게 동해 그곳에 몸을 담근 것을 두고, 누군가 허튼 스토리를 만들어낸 것이겠지. 용연에서 나오며 나는 껄껄 웃으며 말했지. "아홉 용이 내게 머리를 조아리며 장차 금강산을 붓으로 낳으실(毫生) 분이니, 우리 또한 그대의 자식이 아니겠소. 얘들아, 모두 아버님께 절을 올려라, 하더군." 이 말씀은 빼먹고, 어찌 물에 뛰어든 것만 그토록 조롱 삼는단 말인가.
외금강에서 몸을 적신 뒤, 내금강으로 들어 삼불암에 섰다네. 석가모니를 가운데 두고 미륵과 아미타불이 삼존불로 서 있는 이 바위는, 장안사와 표훈사 사이에 있는 랜드마크이지. 장안사는 몽골의 황후가 된 기황후가 크게 불사를 일으켜 번성한 절이니만큼 정통 불교가 아니라 기복(祈福)으로 이름난 절이었지. 하지만 표훈사는 달랐지. 최고의 불경이라 일컫는 화엄경에는 수많은 보살들의 주소록이 있다네. '제보살주처품'이라는 대목인데, 거기에는 해중금강산이 나오고 법기(法起)보살이라는 분이 자리를 잡고 1만2000명의 권속을 거느리고 설법을 하신다고 되어 있지. 그 법기보살이 계신 곳이 바로 표훈사 절이라네.

그러니까 표훈사는, 조선 고유의 부처의 화신이 1만2000봉우리의 금강산을 향해 반야(진실한 생명을 깨달았을 때 생겨나는 지혜)를 설법하고 계신단 말일세. 겸재 선배는 금강산을 한눈에 내려다보는 뷰로 그려내 당시의 감식안들을 감동시켰지. 나는 조선의 경치를 조선의 화법으로 그려 내려는 선배의 뜻을 평생 따르고자 했네. 하지만 지나치게 정밀하고 생생하게 그리려는 뜻은 없었네. 내가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담담한 필치 속에서 의상대사의 제자인 표훈이 절 속에 들어앉아 1만2000봉의 봉우리의 귀를 붙잡는 멋진 정경일세. 조선의 부처 법기보살이 금강산 봉우리들을 향해 설법한다니, 그만한 자부심이 어디 있는가. 사람들은 굳이 이 보살의 의지처를 만들어 동북쪽에 있는 고봉을 법기의 몸(眞身)이라고 부르며, 비주얼을 만들려고 애를 쓰지만, 내 그림을 보게. 한 봉우리를 굳이 돋우지 않았네. 법기진신봉 한 봉우리에 기대는 일을 비웃은 것이네. 표훈사의 담담한 절간 몇 칸이면 그 뜻이 다 서는데 뭐가 불안해 의지처를 세운단 말인가.

나 최북은 금강산이 통째 조선 정신의 큰 절임을 깨닫고, 표훈사에서 내 나름의 진경(眞景)을 개척하고 싶었던 것이라네. 다시는 나를 헛되이 구룡연에 자맥질하는 미친 놈으로 말하지는 말아주게나.




빈섬 이상국 (편집부장·시인) isomi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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