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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칼럼] 작은 기적과 지속가능한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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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은귀 한국외대 교수

정은귀 한국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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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고 나면 화재 소식이다 뭐다 마음 아픈 일이 많은 겨울이다. 이 추운 계절에 따뜻한 희망의 불씨 하나를 보듬어야겠다 싶어 학생들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요즘 우리 학교의 재미있는 풍경 하나. 이 추운 겨울에 매주 화요일 오후만 되면 스무 명 가량의 학생들이 한 교실에 모여 독회를 한다. 진지하게 읽고 토론하는 이 모임은 1년 열 두 달 계속된다.

지난 학기에도 그랬다. 대학원에서 3시간 정규 수업을 하면 나는 녹초가 되는데 아이들은 간단한 식사 후 다시 파릇파릇해져 밤늦게까지 문학작품을 읽고 비평을 공부한다. 발제에 기초한 서로의 읽기에 가감 없이 논평하는 독회 모임이 해를 거듭할수록 수업에서의 토론 문화도 눈에 띄게 좋아졌다. 대학 인문학이 위기를 맞고 있는 시절의 작은 기적이다.
이것은 우리 학교에서 진행 중인 코어(CORE) 인문역량강화사업이 불을 지핀 변화다. 그동안 ACE, BK, CK, HK 등 대학 재정지원 사업이 다양한 이름으로 진행돼 왔는데, 코어사업은 기초인문학 강화를 위해 기획됐다. 인문학 교육의 핵심을 나는 자발성 함양과 공동의 가치를 환기하는 일이라 본다. 교육은 주체적 인간을 기르는 과정이고 대학은 그 과정의 얼개를 완성하는 곳이다.

안타깝게도 우리 교육의 실패한 부분이 바로 자발성과 공공성이다. 머리 맞대고 토론하는 문화도 대학에서 사라져간다. 주체적 개인으로서의 권리와 공적 가치는 어떻게 상생할 수 있는가, 이런 질문들을 통해 세대와 계층ㆍ젠더 간 단절을 넘어서는 공동 문제의식을 키워야 한다. 어떻게 하면 주체성과 자발성을 기르고 공동의 가치를 환기할 수 있을까. 단언컨대 '읽기와 토론'이 으뜸이다.

인문학 공부모임 지원은 코어사업에서 미미한 몫이고 근사한 수치로 환원되지 않지만 현장에서 교육자로 실감하기에 이 사업의 가장 큰 성과다. 이 이야기는 하고 싶다. 대학 지원 사업이든 작가ㆍ예술가 지원 사업이든 규제보다 자율성이 강화되어야 한다는 것. 지속가능한 변화를 위해 신뢰 속에서 꾸준히 진행돼야 한다는 것. 코어사업 또한 숫자로 가시화할 수 없는 학생들의 변화를 보는 기쁨이 있다. 그러나 그 뒤에는 수량화할 수 없는 부분을 성과지표로 만들어야 하는 피로가 있다. 학생들과 선생이 체감하는 이 변화를 어떤 숫자로 증명할 수 있나.
'인문역량'을 강화하는 길은 학문후속세대가 빈곤해진 자리에 공부하는 건강한 터를 돋우는 데 있다. 그러려면 학생들의 자발적인 참여와 성장을 지속적으로 도모하는 방향성이 중요하다. 수치와 지표, 생산성으로 환산되지 않는 교육적 가치를 신뢰하고 도모해야 한다. 자율성과 공동의 가치는 지속가능한 변화로 추구돼야 할 사회의 마중물이고 '읽기와 토론'은 그 뿌리다. 코어사업 덕분에 학생들의 자발적인 공부모임이 활성화되고 읽기와 토론을 통해 인문학에 관심 두는 학생이 늘어난 이 작은 기적. 교육에서 마중물이 얼마나 중요한지 실감한다.

고칠 점도 많다. 사업 성격에 맞지 않는 과중한 규제들과 행정 부담, 재정 지출의 방식 등이 고민거리다. 인문학 석사 및 박사과정 학생들에 대한 지원도 강화돼야 한다. 무엇보다 인문학이 이 사회의 건강한 가치를 설정하는 지남철의 역할을 한다는 믿음 하에 지속 가능한 정책이 큰 틀에서 이어지면 좋겠다. 이 사업도 올해가 마지막이다. 학생들 사이에 움튼 작은 기적을 어떻게 이어갈까 고민이다. 학생들은 조금만 도와주어도 크게 자란다. 이 작은 기적이 교육 현장에서 확산되고 꾸준히 이어지길 바란다.

정은귀 한국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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