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론 잘 안다. 나는 행복지수가 높은 사람. 걸을 때 행복하고 감사하다. 시에 대해 이야기할 때, 책 읽을 때 행복하다. 노래 부를 때, 강의 갈 때도 행복하다. 파란 하늘 아래서 행복하다. 수업에 3, 4분 늦는다면 그건 유난히 맑은 하늘에 한 눈 팔려 그리 된 거다. 그런데 "선생님은 언제 행복하세요"란 질문에 왜 당황했을까. 꽤 오랫동안 행복이란 단어를 밀쳐두고 있어서다. 그래서 쭈뼛쭈뼛 고백했다.
"능력 없으면 너네 부모를 원망해. 돈도 실력이야." SNS에서 대놓고 또래들을 조롱한 이의 엄마는 국정농단으로 감옥에 있다. 그동안 권력은 더 높은 권력의 눈치만 보며 타협했다. 상식과 희생과 인권과 공공의 가치는 버려진 이름이었다. 대한민국 헌법 10조에 규정된 행복추구권은 너무 먼 권리였다. 내게도 행복은 윤리적인 금기어였다. 도저히 더는 안 된다는 지경에 이르러 우리 모두의 염원이 모여 촛불 혁명을 만들었다. 새 대통령, 바뀐 바람, 새로운 변화의 가능성으로 들뜬 지금에 와서도 행복은 여전히 좀 이상한 이름이다. 쓰지 않은 근육 마냥 욱신욱신하다. 우리는 여전히 불안하고 여전히 경쟁적이고 여전히 쉽게 얼굴 붉히며 싸운다.
인디고 서원에서 마주한 그 질문은 내게 새로운 숙제를 던졌다. 우리 몸의 근육도 안 쓰면 약해지고 쓰면 강해지듯, 마음의 행복 또한 만들어 쓰고 단단히 키울 필요가 있다. 행복의 근육은 행복 이 가능한 조건을 뼈대로 하여 지속적으로 키워나가는 것. 행복의 조건은 아파트나 권력, 거창한 성취가 아니라 각자의 개성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는 인간됨의 기본 권리이며 정상의 시스템을 정상화하는 일이다. 행복의 근육을 골고루 키우려면 그릇된 행복의 기준을 바꾸어야 한다. 나만 잘 살면 된다는 이기심과 행복 평균주의에서 벗어나 다름과 차이가 함께 공생하는 삶, 살만한 나라를 만들겠다는 염원이 실천으로 구체화될 때 행복은 커진다. 무엇보다 행복의 근육은 우리 각자가 매일 처음처럼 연습해야 한다. 오늘 쓰지 않으면 그만큼 퇴화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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