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나면서 금 숟가락을 물고 나왔다는 내 족보를 잠깐 들먹이겠네. 나는 해남에 문중을 개창한 어초은(윤효정)의 7대 종손일세. 어초은은 슈퍼리치였던 해남 정씨 정귀영의 외동딸과 혼인함으로써 어마어마한 재산을 물려받았고, 세금을 못 내는 빈민들을 위해 세금을 대납해주고 옥살이를 면하게 해줬다는 개옥문(開獄門)을 세 차례나 했다는 훌륭한 부자였다 하네. 이후에 자손들이 번창하여 벼슬도 높고 학문도 높아, 고산(윤선도) 같은 대학자 시인을 낳았지. 나는 고산의 증손으로, 사남(四男)의 혈육이었으나, 장남 종손이 자식이 없어 고산 증조부가 가장 사주가 좋아 보이는 나를 찍어 대를 잇게 하였다네.
1694년 갑술환국이 일어났지. 장희빈을 밀던 남인들이 5년의 집권 끝에 밀려난 사건이었다네. 서인이 득세하면서 우리 집안도 조마조마한 길을 걸었지. 1696년 7월 마침내 일이 터졌네. 무덤에 나무인형을 묻어 서인을 모해했다는 사건이 일어났고, 이 일로 희빈의 아들인 동궁(나중의 경종)이 연루되었다는 소문이 유포되고 있었지.
방안에 처박혀 말이나 그리며 지내다가, 1712년 양어머니(청송 심씨)의 별세를 기회 삼아 해남으로 귀향을 했네. 열세 살에 올라와 마흔다섯 살에 내려갔으니, 나는 거의 한양사람이나 다름없었네. 하지만 서른 살 무렵에 수천 냥의 채권 문서를 불태워 고을 사람들의 빚을 탕감해준 적이 있고 종갓집 소유의 망부산 나무를 베어 흉년에 구휼을 행한 때도 있어서 해남에선 종손인 나를 크게 떠받들었지. 뜻을 접고 내려온 이에게 그런 칭송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어느 날 거울을 들여다보며 부리부리한 눈과 카랑카랑한 수염으로 무인(武人)의 풍모를 지녔다는 나를 그려 보았네. 그리고 또 그리면서 내 삶의 의미를 묻고 또 물었네. 여담이지만 손녀의 아들인 정약용이 내 자화상과 진단타려를 보고는 "아마 난 외탁을 한 것 같다"고 했다니, 내가 얼굴을 남겨 놓은 건 백번 잘한 일 같구려.
빈섬 이상국 (편집부장·시인) isomi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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