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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counter]와유의 즐거움, 詩로 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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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단 53년째…당진서 새 시집 준비 중인 홍신선 시인

[사진=노태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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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탄서 선산 이전하며 전원생활 2015년부터 시작
시도 자연 닮아가...'죽음' 화두 놓고 깊은 고민도
노벨상 못타는 건 번역뿐 아니라 국력도 무시 못해
올림픽으로 남북교류 좋지만 선전 이용은 경계해야


[아시아경제 노태영 기자]충남 당진 시 순성면 양유리. 서울에서 100㎞ 정도 떨어진 곳이다. 눈이 내린 지난 11일. 자동차를 운전해 그곳까지 가는 데 세 시간 반이 넘게 걸렸다. 홍신선(74) 시인은 기자를 걱정했다. "마을 입구 도로 사정이 안 좋습니다. 조심 운전하세요." 시보다 시인의 마음이 먼저 다가왔다.
시인의 거처는 야트막한 산 아래 앞이 탁 트인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올해로 등단 53년째를 맞은 홍 시인은 이곳에서 '와유(臥遊)의 즐거움'을 만끽하고 있다. 그는 2015년 겨울 당진에 정착했다. 선산을 경기도 동탄에서 당진으로 이장하면서다. 전원에 파묻힌 시인도, 그가 쓰는 시도 자연을 닮아갔다. 그 결실이 올해 새 시집에 담겨 나온다.

시인은 "집 바로 앞에 금강송 묘목 열 그루를 심었다. 주변에선 (나이를 생각해서) '미쳤다'고 했다"면서 "곧 나올 시집에서는 귀촌한 얘기를 중심으로 자연과 어울리는 방법을 고민했다"고 고백했다. 새 시집에는 산문도 싣는다. 독자에게 다가가려는 시도다. 그는 "최근에 조송식의 '산수화의 미학'을 재미있게 읽었다. 자연과 교감하는 아름다움이 담겼다"고 했다.

홍 시인이 인터뷰를 하다 말고 벌떡 일어나 창가로 갔다. 밖에서 고양이 한 마리가 시인을 뚫어져라 쳐다본다. 시인은 고양이에게 사료를 내다 주었다. 그는 "집 주변에 고양이가 열 마리 정도 된다. 먹이를 주니 하루에도 몇 번씩 제 집 드나들 듯 나한테 온다"고 했다. 그러면서 멀리 뛰어가는 다른 고양이를 보고 "저 고양이 이름은 막둥이야"라며 미소를 지었다.
[사진=노태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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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은 죽음을 화두로 대화를 이어갔다. 그는 죽음과 친해지려고 노력한다고 했다. 죽음을 현실로 받아들이면서 마음가짐이나 정신자세가 어때야 할까 고민한다는 것이다. 그는 "젊었을 때는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죽음을 얘기했다면 요즘에는 내 몸의 변화로 절실함을 느낀다"고 했다. 사실 죽음은 홍 시인이게 생소한 주제가 아니다.

'건답(乾畓)에 까만 털투성이의 어둠이 와서 어슬렁거린다./내다버린 폐기된 사랑들이/잿가리처럼 그 바닥에 시대(時代)의 뚝에 쌓여있다./차거운 공간(空間)으로/내비치는 환한 속살을 여미며/달밤들은 멀리 비켜 서 있느니/꿇어 엎드린 산맥(山脈)뒤에서 허공은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이 밤에 우리가 뼈로써 곳곳에 뒤벼놓은/침묵(沈默)을/공기들이 어석거리며 밟히는 소리를/밤이 더욱 까만 털투성이의 몸을 뒤설레인다.'


첫 시집 '서벽당집'(1973)에 실린 '밤'이란 시다. 어두운 이미지가 시를 지배한다. 젊은 시인의 내면이 읽힌다. 죽음과 허무. 홍 시인은 "1960년대의 사조는 카뮈, 사르트르 등 실존주의에 있었다"면서도 "개인적으로 건강이 안 좋았다. 깡말라 '와리바시'(젓가락)로 불렸다"고 했다. 죽음과 허무는 선불교의 가르침으로 이행한다.

'올 겨울 제일 춥다는 소한(小寒)날/남수원 인적 끊긴 밭 구렁쯤/마음을 끌고 내려가/항복받든가/아니면/내가 드디어 만신창이로 뻗든가//몸 밖으로 어느 틈에 번개처럼 줄행랑치는/저/눈치꾸러기 그림자.'

연작시집 '마음經'(2012)에 실린 첫 번째 시다. 이 연작시집에는 1991년부터 2011년까지 쓴 시 예순 편을 담았다. 홍 시인은 "1990년대 초반 동구권이 무너지면서 정치적 억압에 맞선 현실주의 시인들의 힘이 줄 끊어진 연처럼 날아갔다. 이 시기에 개인 차원의 내적 깨달음을 많이 생각했다"고 했다. 하지만 '종교적 믿음은 아니다'라고 선을 그었다. 그는 "동일한 대상을 새롭게 인식하고 바라보는 데 관심이 있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1965년 '시문학'으로 등단했다. 당시에는 3회추천이 원칙이었다. 추천시인은 김현승 선생이었는데, 마지막 추천은 논산훈련소에서 받았다. 홍 시인은 "추천완료 소감을 보내달라고 해서 내무반 침상에 엎드려 '괴발개발'로 쓴 기억이 있다"며 웃었다. 그는 원래 김내성의 탐정소설 '마인'에 빠진 추리작가 지망생이었다고 한다.

홍신선 시인의 고향은 경기도 화성이다. 동탄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이주했다. 그는 "촌놈이라 (서울) 아이들하고 적응이 안됐다. 도서관에서 매일 책을 보곤 했는데 그때 '마인'을 밤새워 읽었다"면서 "소름이 끼치는 작품이었다. 나도 이런 걸 써야겠다고 생각했다"고 기억을 돌이켰다. 시인은 한동안 셜록 홈스나 괴도 루팡이 나오는 탐정소설에 심취했다.

등단 무렵에 대한 대화는 자연스럽게 최근의 신춘문예와 노벨문학상으로 이어졌다. 홍 시인은 "(신춘문예에) 당선돼도 이후 활동이 기대에 못 미치는 경우가 많다"면서도 "제도에 대한 비판도 많지만 새해 첫날 신문지면을 화려하게 장식하는 게 없다고 생각하면, 문학이란 동네가 재밌는 일이 별로 없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홍 시인은 "최근에는 젊은 작가의 작품을 많이 못 읽었다"고 전제한 뒤 손택수, 안도현, 나희덕, 이원 시인 등을 꼽으며 "이들은 꾸준히 자기를 지키고 끝끝내 살아남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는 "손끝의 재주는 한계가 있다. 문학정신이 단단해야 한다"면서 "시류에 민감하면 안 좋다. 쫓아가면 자기 게 없다. 어떤 유형에 집착하면 아류가 된다"고 조언했다.

노벨상을 비롯한 여러 문학상에 대해서는 "얼마나 공정한 심사인지, 심사 위원들이 시를 보는 안목을 갖추고 있는지가 중요하다"면서 "이를 충족하는 상이라면, 공적으로나 개인적으로 인정 받는 의미가 있다"고 했다. 그는 "노벨상도 마찬가지인데 두 기준을 충족시키는 경우도 있지만 아닌 경우도 많다"고 덧붙였다.

홍 시인은 한국이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를 배출하지 못하는 이유가 번역이 부족해서라는 주장에 반만 고개를 끄덕였다. "국력(에 따른 문화적 이해)도 도외시할 수 없다. 서정주의 '국화 옆에서'를 읽을 때 우리는 국화가 절개 등 고상한 기품을 상징한다고 해석하지만 서양에서는 장례식 때 사용하는 꽃 이외의 이미지를 생각하기 어렵다."

[사진=노태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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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 시인은 평생 시인이자 교육자의 길을 걸었다. 그러나 2003년부터 계간 '문학선'을 발행해 후배 문인들에게 발표 공간을 제공하는 일도 꾸준히 해왔다. 그는 "문학 교과서를 썼는데 한해 10만부 이상 팔려 인세를 좀 받았다. 이 돈으로 문학잡지를 만들었다"고 했다. "잡지를 만들면서 시인, 평론가들에게 원고료도 줄 수 있어 기쁘다"고 덧붙였다.

시인은 평창동계올림픽을 계기로 남북 예술교류의 물꼬가 열린 데 대해 "(분단 시대에) 교류는 꼭 필요하다. 예술, 특히 문학은 혼자 한다지만 주변과 영향을 주고받는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그러나 "북쪽에서는 문학도 체제 선전을 위한 도구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경계했다. 그는 '지하에서 활동하는 저항적인 작가들'에 관심을 보였다. 그러고 보니 그가 2004년 환갑을 기념해 금강산에 다녀온 뒤 썼다는 시가 다시 읽혔다. 2월말이라 눈보라가 심했다고 한다. 제목은 '금강산 가서'.

'내장 속 굽이굽이 깊이 잠긴/쇳된 소리란 소리 죄다/아래 뱃살 꼿꼿하게 끌어올려 내지르는/멸족 직전의 어느 시절 소리꾼들인가/공중에 교살된 듯 매달린/삼선암 뒤의 귀면암/뒤의 저 절부암…//이 수천 수만의 외눈깔을 뜬 거인 햇볕들은/철거된 구름 마을 폐허의 날리는 눈들 등짝 틈으로/반짝반짝/때 없이 몰린 남쪽 등산객들 내려다본다'

홍신선=1944년 경기도 화성에서 출생했다. 1965년 월간 '시문학' 추천을 통해 등단했다. 시집 '서벽당집', '겨울섬', '삶, 거듭 살아도', '우리 이웃 사람들', '다시 고향에서', '황사바람 속에서', '자화상을 위하여', '우연을 점 찍다', '마음經' 등이 있다. 녹원문학상, 현대문학상, 한국시협상, 현대불교문학상, 김달진문학상, 감삿갓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당진=노태영 기자 factpoet@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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