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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의 발견]윤두서의 죽음과 진단타려도(1)

최종수정 2015.10.16 11:04 기사입력 2015.10.16 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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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두서 '진단타려(단선생 나귀에서 떨어지다)도'의 일부분.

윤두서 '진단타려(단선생 나귀에서 떨어지다)도'의 일부분.

나, 공재 윤두서는 1715년 11월26일 48세로 세상을 마감했다네.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는 가문으로 존경받던 해남 윤씨 가문 종손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집안은 물론 향리 일대를 발칵 뒤집었지. 그해 초겨울 나는 감기 비슷한 증상으로 몸져 누웠는데, 고열이 심해져 다시 일어날 수 없었지. 초상을 치를 무렵 역병이 번져 간소하게 장례를 마무리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나의 병은 전염병이 아니었나 싶네. 누구든 다 왔다 가는 생이니, 조금 먼저 간들 아쉬울 것도 없고 늦게 간다고 안도할 일도 없지만, 그 무렵 나는 생의 피로감에 탈진해 있었으니, 역신(疫神)이 어찌 나 같은 자를 피해 가겠나.

태어나면서 금 숟가락을 물고 나왔다는 내 족보를 잠깐 들먹이겠네. 나는 해남에 문중을 개창한 어초은(윤효정)의 7대 종손일세. 어초은은 슈퍼리치였던 해남 정씨 정귀영의 외동딸과 혼인함으로써 어마어마한 재산을 물려받았고, 세금을 못 내는 빈민들을 위해 세금을 대납해주고 옥살이를 면하게 해줬다는 개옥문(開獄門)을 세 차례나 했다는 훌륭한 부자였다 하네. 이후에 자손들이 번창하여 벼슬도 높고 학문도 높아, 고산(윤선도) 같은 대학자 시인을 낳았지. 나는 고산의 증손으로, 사남(四男)의 혈육이었으나, 장남 종손이 자식이 없어 고산 증조부가 가장 사주가 좋아 보이는 나를 찍어 대를 잇게 하였다네.

1680년 13세 때 해남서 한양으로 올라와, 비교적 늦은 나이인 25세에 진사 시험에 합격한 나는 비로소 세상에 큰 뜻을 펼치려 의기를 돋우고 있었네. 하지만 그 무렵(숙종대)의 끝없는 정쟁은 '인재'가 필요한 시절이 아니었네. 오직 파당(派黨)과 정략의 무리들이 득세하고 그 반대파들을 뒤집어 제거하는 피비린내의 나날들이었지. 그런 시류에 휘말리지 않고자 나는 그림을 그렸네. 종이 속에는 하얀 여백의 세상이 있고, 그 속엔 나의 뜻과 나의 눈과 나의 실학(實學)을 거리낌 없이 담을 수 있었지.

1694년 갑술환국이 일어났지. 장희빈을 밀던 남인들이 5년의 집권 끝에 밀려난 사건이었다네. 서인이 득세하면서 우리 집안도 조마조마한 길을 걸었지. 1696년 7월 마침내 일이 터졌네. 무덤에 나무인형을 묻어 서인을 모해했다는 사건이 일어났고, 이 일로 희빈의 아들인 동궁(나중의 경종)이 연루되었다는 소문이 유포되고 있었지.

방안에 처박혀 말이나 그리며 지내다가, 1712년 양어머니(청송 심씨)의 별세를 기회 삼아 해남으로 귀향을 했네. 열세 살에 올라와 마흔다섯 살에 내려갔으니, 나는 거의 한양사람이나 다름없었네. 하지만 서른 살 무렵에 수천 냥의 채권 문서를 불태워 고을 사람들의 빚을 탕감해준 적이 있고 종갓집 소유의 망부산 나무를 베어 흉년에 구휼을 행한 때도 있어서 해남에선 종손인 나를 크게 떠받들었지. 뜻을 접고 내려온 이에게 그런 칭송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어느 날 거울을 들여다보며 부리부리한 눈과 카랑카랑한 수염으로 무인(武人)의 풍모를 지녔다는 나를 그려 보았네. 그리고 또 그리면서 내 삶의 의미를 묻고 또 물었네. 여담이지만 손녀의 아들인 정약용이 내 자화상과 진단타려를 보고는 "아마 난 외탁을 한 것 같다"고 했다니, 내가 얼굴을 남겨 놓은 건 백번 잘한 일 같구려.
빈섬 이상국 (편집부장·시인) isomi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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