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故)노무현 전 대통령이 2009년 4월30일 서울 서초구 대검찰청사에 도착한 모습. 노 전 대통령을 중심으로 우측에는 당시 변호를 맡은 문재인 대통령의 모습이 보인다.[이미지출처=연합뉴스]
[아시아경제 정완주 정치사회 담당 선임기자] 적폐청산을 놓고 전, 현직 대통령끼리 정면으로 충돌하면서 정치권에 큰 파장이 일 것으로 보인다.
문재인 대통령은 18일 이명박 전 대통령의 전날 기자회견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을 거론한 것에 대해 ‘분노’라는 단어를 꺼내들며 격한 반감을 드러냈다.
문 대통령은 이어 검찰 수사를 정치보복이라고 언급한 이 전 대통령의 발언에 대해 "우리 정부에 대한 모욕이며 대한민국의 대통령을 역임하신 분으로서 말해서는 안 될 사법질서에 대한 부정이고 정치 금도를 벗어나는 일"이라고 지적했다.
청와대는 전날 이 전 대통령의 기자회견에 대해 처음에는 “노 코멘트”라는 반응을 보였다. 이에 대해 청와대 핵심 관계자는 이날 “즉각 말씀드리는 것보다 정리된 상황들을 하는 게 맞는 것이라 판단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이날 오전 티타임 때 문 대통령이 ‘노 전 대통령의 죽음을 직접 거론하며’라고 표현하면서 ‘분노’와 ‘금도’라는 단어를 직접 사용했다고 전했다.
청와대는 또 문 대통령의 발언이 검찰 수사의 가이드 라인이 아니라는 점도 분명히 했다. 이 관계자는 “(문 대통령이) 마치 청와대가 검찰에 개입하는 것 같은 (이 전 대통령의) 표현이 정부에 대한 모욕이라고 했다”면서 “청와대가 (검찰에) 가이드라인을 제시하지 말라는 게 국민의 명령이다. 새로운 나라 만들라는 정부가 그런 지침, 꼼수는 쓰지 않는다”라고 강조했다.
◆문 대통령의 역린...‘노무현 트라우마’
문 대통령이 이 전 대통령의 발언을 두고 민감하면서도 강경하게 반응하는 이유는 소위 ‘노무현 트라우마’가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문 대통령은 잘 알려졌다시피 노 전 대통령이 퇴임 후 검찰 수사를 받을 때 변호인을 맡았다.
그 누구보다 당시 검찰 등 사정기관의 행태에 대해 직접 피부로 느낄만한 위치였다. 그런 상황에서 노 전 대통령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은 평생 마음의 짐으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다.
지난 대선 때 방송토론회에서 침착함을 잃지 않았던 문 대통령이 감정을 드러내 험악한 장면이 연출된 것도 노 전 대통령과 관련된 발언이 나왔을 때다.
대선을 2주 앞두고 열린 4월25일 ‘19대 대선후보 원탁토론회’에서 당시 문 후보는 자유한국당 홍준표 후보와 노 전 대통령의 뇌물수수 여부를 놓고 정면으로 충돌했다.
홍 후보는 이날 토론회에서 "수사기록을 보면 당시 중수부장의 말은 노 대통령이 박연차 회장에게 직접 전화해 돈을 요구했다고 돼 있다"고 지적했다.
이에 문 후보는 “이보세요. 제가 조사 때 입회한 변호사입니다”라고 언성을 높였다. 잠시 당황한 홍 후보는 "아니 말을 왜 그렇게 버릇없이 하느냐. '이보세요'라니"라고 맞받아치는 등 잠시 험악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따라서 문 대통령은 이 전 대통령이 다시 노 전 대통령의 죽음을 거론하면서 정치보복이라고 단정하자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었다고 판단한 것으로 풀이된다. 문 대통령이 검찰 수사와 연관된 정치 문제에 대해 직접 의견을 표명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것도 전직 대통령을 향해 고강도의 직격탄을 날린 것이다.
이 전 대통령에 대한 문 대통령의 감정이 그대로 묻어나는 대목이다. 문 대통령과 친노(친노무현)계는 이명박 정부의 무리한 검찰수사가 노 전 대통령의 비극으로 이어졌다는 인식이 강하다.
그런 상황에서 이 전 대통령이 직접 노 전 대통령의 죽음을 거론하면서 정치보복 운운하는 것에 대해 참을 수 없는 모욕을 느꼈을 가능성이 높다. 이 전 대통령의 발언이 문 대통령의 '역린'을 건드린 셈이다.
◆전, 현직 대통령의 정면 충돌이 정치권에 미칠 파장은?
전, 현직 대통령이 마주보며 달리는 열차처럼 충돌하는 양상을 보이자 정치권도 들썩거리고 있다.
우원식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는 이날 국회에서 열린 당 정책조정회의에서 "이 전 대통령이 적폐청산 수사를 정치공작, 짜맞추기 수사라고 강변한 것은 전직 대통령으로서의 품위와 국민에 대한 예의를 저버린 것"이라며 "재임 시절 권력형 비리 사건 수사에 노 전 대통령 서거를 끌어들인 것은 최소한의 정치적 금도도 넘은 것으로 대단히 유감스럽다"고 말했다. 청와대 발표와 궤를 같이하는 수준이다.
국민의당도 이 전 대통령의 기자회견에 대해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겠다는 후안무치한 변명"이라고 비판했다. 김동철 국민의당 원내대표는 이날 당 원내정책회의에서 "다스는 누구 것인지, 특활비 관련 보고를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 이 전 대통령에게 묻고 싶다"며 이같이 말했다. 이어 "이 전 대통령이 있어야 할 자리는 기자회견장이 아니라 차디찬 감옥"이라고 덧붙였다.
한국당의 반응은 아직까지 사태를 예의주시하면서 눈치를 보고 있지만 언제든 포문을 열고 강경대응으로 나올 가능성이 크다.
홍준표 한국당 대표는 이 전 대통령을 직접 언급하진 않았지만 문재인 정부를 에둘러 비판했다. 홍 대표는 전날 기자들과 만나 "검찰의 수사가 과하다"며 "이 전 대통령이 국정원과 상의해서 돈을 받았다는 것이 입증되지 않는다면 아무런 범죄혐의가 되지 않는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홍 대표는 “두 분(이명박ㆍ박근혜 전 대통령)은 다 한국당 출신 대통령이다. 당원도 아니고 자신들이 나갔다”고 선을 그었다. 적폐청산에 대한 국민의 지지가 높은 상황에서 이 전 대통령을 무조건 옹호할 경우 불어닥칠 역풍을 우려하는 듯한 발언이다.
이 전 대통령의 참모들은 일제히 방송 인터뷰 등에 적극 나서면서 총공세를 펼치고 있다. 심지어 ‘노무현 정부의 파일’까지 거론하면서 선전포고를 예고하는 듯한 입장을 보이기도 했다.
이명박 정부 청와대 정무수석을 지낸 김효재 전 의원은 이날 KBS라디오에 출연해 "국민의 지지를 사기 위한 여러 가지 행위를 할 것이고, 가만히 있지는 않겠다"면서 "이명박 정부도 5년 집권했고, 집권이란 모든 사정기관의 정보를 다 들여다보는 것이다. 왜 우리라고 아는 게 없겠느냐"고 밝혔다.
이 전 대통령의 참모들이 문 대통령을 향한 ‘노무현 카드’를 하나 둘씩 꺼내들면서 보수 궤멸을 막아야 한다는 여론전 프레임을 반복할 경우 정치권은 점점 소용돌이에 휘말릴 여지가 다분하다.
특히 이 전 대통령의 기자회견에 불쾌감을 느낀 검찰이 문 대통령의 강경 발언에 힘입어 수사에 속도를 낼 경우 정치권은 시계제로의 상황에 빠질 수도 있다. 검찰 수사가 급물살을 타는 것은 결국 이 전 대통령의 구속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의미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이 전 대통령의 구속이 임박했다고 판단해 측근들이 노무현 정부의 관련 파일을 폭로하게 된다면 지방선거를 앞둔 정치권의 진흙탕 싸움은 예측 불가의 상황으로 전개될 수도 있다. 여권이 어떤 카드로 반격할지도 내용에 따라 언제든 화약고가 될 수 있다.
이 경우 당장 개헌과 권력기관 개편 등 당면한 현안을 논의하기 위한 개헌ㆍ사법개혁 특위 운영에도 차질이 빚어질 수밖에 없다. 또한 2월 임시국회 역시 지난해 말에 겪었던 파행을 되풀이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 같은 조짐은 벌써부터 나타났다. 여권에서 이 전 대통령 재임 시절 국정원 특활비 일부가 김윤옥 여사의 명품 구입 등에 사용됐다는 역공에 나서기도 했다.
박홍근 민주당 원내수석부대표는 "김희중 전 대통령 제1부속실장의 검찰 진술 내용을 제보받았다"면서 "어제 이 전 대통령이 갑자기 회견을 자청한 결정적 계기는 특활비가 김 여사 측에 달러로 전달됐고, 사적으로 사용됐다는 김 전 실장의 진술이 컸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이 전 대통령 측은 '논두렁 시계' 논란에 대한 앙갚음이라며 강하게 반발했다.
김두우 전 청와대 홍보수석은 라디오에 출연해 "그 돈(국정원 특활비) 중 일부가 김 여사에게 흘러들어 가서 김 여사가 해외 순방 때 함께 가셔서 거기서 해외에서 명품을 구입했다, 이런 식으로 가려고 한다는 게 우리의 대충 판단"이라고 말했다.
김 전 수석은 이어 "당신들이 과거에 모셨던 분의 참담함을 그대로 돌려주고 싶다, 이런 심리가 담겨있는 것 같다"며 "너무 치사한 이야기여서 노골적으로 담기는 그렇지만, 그런 느낌을 받았다"고 비판했다.
정완주 정치사회 담당 선임기자 wjchung@asiae.co.kr
꼭 봐야할 주요뉴스
"다른 곳에서 장사하면 된다"…성심당에 월세 4억 ... 마스크영역<ⓒ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