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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인서의 책갈피]빛나-서울 하늘 아래

최종수정 2018.01.05 11:15 기사입력 2018.01.03 17:30

장인서 기자
장인서 기자

"내 이름은 '빛나'다. 이제 곧 열아홉 살이 된다."

갓 대학에 입학한 전라도 어촌 출신의 소녀. 이야기는 간단한 인사말로 시작된다. 서울 고모 집에 더부살이를 하게 된 빛나는 도시가 낯설고 복잡하게만 느껴진다. 사촌의 홀대와 잦은 불화에 넌덜머리가 날 무렵 소녀는 도시를 여행하기 시작한다. 이른 귀가 대신 선택한 방황. 그 여정은 이야기의 세계로 그녀를 인도한다. 거리는 어느덧 모험과 상상의 공간이 됐다.

"시간이 날 때마다 거리를 돌아다녔다. 버스나 지하철을 타고 먼 곳까지 가보기도 했다. 처음에는 집 안에서 벌어진 일들을 잊기 위해서였다. (…) 찰카닥 소리를 내며 아파트 문을 닫고 나와 길로 이어지는 가파른 계단을 내려오는 바로 그 순간부터, 나는 무거운 짐을 벗어버린 듯 자유를 느꼈다."(12쪽)

종로 대형서점은 빛나의 단골 여행지 중 하나다. 서점을 드나들던 중 빛나는 우연한 계기로 복합부위 통증 증후군을 앓는 여인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아르바이트를 하게 된다. 그녀의 이름은 살로메. 세상과 단절된 체 집안에 갇혀 죽음을 기다리는 여인이다. 살로메의 부모는 딸에게 막대한 재산만 남긴 채 자살했다. 살로메는 빛나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통해 바깥세상을 보고 도시로 상상여행을 떠난다.

빛나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모두 다섯 편이다. 북에 있는 고향을 그리워하며 비둘기를 키우는 아파트 수위 조씨, 절망에 빠진 이웃을 구하는 미용실 원장과 어린이 키티, 보육원에 버려진 아기 나오미와 간호사 한나, 탐욕과 거짓말에 희생당하는 아이돌 가수 나비, 빛나를 좇는 얼굴 없는 스토커 등 서울 곳곳에서 일어나는 각양각색의 일들이 그녀의 입을 통해 전해진다.
2016년 4월부터 2017년 4월까지 꼭 일 년간 벌어진 일이다. 현실과 상상력은 소설을 지탱하는 두 개의 축이다. 모든 이야기는 현실과 상상력이라는 씨실과 날줄로 촘촘하게 짜여있다. 빛나에게나 살로메에게나 이야기는 삶의 고통을 줄여주는 진통제나 다름없다. 하지만 지극히 현실적인 인물들의 면면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실제로 일어난 일이든 지어낸 것이든 상관없다는 생각이 든다. 나와 이웃, 어찌 보면 서울 하늘 아래 서로 연결된 우리 모두의 이야기로 만드는 르 클레지오(77)의 글솜씨 덕분이다.

"각각의 이야기는 서로서로 연결된다. 지하철 같은 칸에 탔던 사람들이 언젠가는 서울이라는 대도시 어디에선가 다시 만날 운명이라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처럼 말이다."(190쪽)

클레지오의 시선은 도시의 화려함에 머물러 있지 않다. 그곳에서 사는 사람들, 즉 주인공 빛나처럼 서울 하늘 아래 발 딛고 살아 있는 인간이다. 사회의 주변인, 소외계층에 가까운 그들의 사연은 남북문제, 역사와 전통, 세대 갈등, 정치사회 문제, 음식과 종교, 일상의 공포 등 다양한 주제를 품고 있다. 또한 서울의 구석구석이 배경으로 등장한다. 홍대와 신촌 골목길, 방배동 서래마을, 당산동, 오류동, 충무로, 명동, 청계천, 잠실, 한강 등. 저자가 직접 다닌 동네와 만난 사람들, 들은 이야기들이 작품에 녹아 있다.

[장인서의 책갈피]빛나-서울 하늘 아래
소설에 그려지는 인간 군상과 도시 풍경은 조금은 쓸쓸하고 한편으로는 서정적이다. 절망과 슬픔, 소외와 좌절이 쌓여 있지만 따듯한 인간애가 공존하는 장소다.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빛나의 이야기들은 생명의 소중함과 삶을 지키려는 용기를 전하는 매개체다. 결국 저세상을 향해 영혼이 사라지기 전까진 완강히 저항하며 살아내야 하는 것처럼, 절망과 좌절을 통해 생은 더욱 빛난다는 희망을 마주한다.

"나는 빛나다. 이제 스무 살이다. 나는 서울이라는 거대한 도시의 하늘 밑에 혼자이다. 많은 사람을 만났고, 많은 사건을 겪었고, 많은 것을 경험했다. (…) 나는 서울의 하늘 밑을 걷는다. 구름은 천천히 흐른다. 강남에는 비가 내리고, 인천 쪽에는 태양이 빛난다. 비를 뚫고 북한산이 거인처럼 떠오른다. 이 도시에서 나는 혼자다. 내 삶은 이제부터 시작될 것이다."(237쪽)

클레지오는 1940년 프랑스 니스에서 태어났다. 1963년 스물 셋의 나이에 첫 소설 '조서'로 르노도상을 수상하면서 등단했다. 1980년 '사막'으로 아카데미 프랑세즈가 수여하는 폴 모랑 문학대상을 수상했고, '황금 물고기' '우연' '폭풍우' 등 40여권의 작품을 썼다. 2008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2001년 한불작가 교류행사를 위해 처음 방한한 이후 수차례 한국을 오갔다. 2007년 이화여대에서 석좌교수를 지냈고, 2011년 제주도 명예도민으로 위촉됐다. 지난 10월엔 제주도를 배경으로 한 소설 '폭풍우'를 출간했다.

국제부 기자 en1302@

<르 클레지오 지음/송기정 옮김/서울셀렉션/1만4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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