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섭거나 잔혹한 장면 때문만은 아니다. 록그룹 도어스의 '디 엔드' 잔잔한 선율 아래 작열하는 네이팜탄이나 바그너의 '발퀴레의 기행' 장엄한 가락 속 퍼붓는 폭격은 그저 감독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위한 소도구일 뿐이었다.
공포. 영화 속 주인공 윌라드 대위는 같은 미군인 커츠 대령을 암살하라는 비밀지령을 띠고 캄보디아 밀림 속으로 파견된다. 메콩 강을 따라 윌라드 대위가 목격하게 되는 것은 초점 잃은 총구와 환락에의 탐닉, 매달린 시체와 잘려진 베트남 아이들의 팔들, 그리고 광기 어린 커츠 대령의 독백이다.
당초의 지령대로 임무를 완수하고서 사령부로 돌아가는 윌라드 대위의 얼굴에 커츠 대령의 독백이 서려 있다, 적으로 변한 바로 그 공포가! 그렇다, 감독은 공포를 이야기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 시절 젊었던 나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왜 그랬을까, 나는 왜 그 메시지를 놓쳤던 것일까.
비슷한 경험이 또 있다. 오래 전 학창 시절에 읽었던 책 '역사란 무엇인가'(에드워드 핼리트 카 저)를 다시 읽고 나서의 깨달음 때문이었다. 스무 살 즈음 이 책을 읽고서 비공개 모임에서 함께 토론까지 했지만, 나의 기억은 ‘역사는 과거와 현재와의 대화’라는 한 문장에 머물러 있었다. 그저 사회과학적 인식을 쌓기 위해 반드시 읽어야 하는 책들 중 하나 정도로 치부하고 넘어갔다. 30년이 지난 지금 그 책을 다시 읽고서 느꼈다. 그다지 길지 않은 분량, 그러나 엄청난 내용을 담고 있는 책이라는 사실을! 그 시절 나는 정말 엉터리로 책을 이해했던 것이다, 저자가 말하고자 한 ‘진보의 주체로서 인간’에 대해 전혀 가닥조차 잡지 못한 채….
소크라테스의 명언으로 알려진 ‘네 자신을 알라’는 실상 ‘모르고 있는 네 자신을 알라’는 격언이었다고 한다. 세월이 흘러 이제 지천명이 되었지만 나는 얼마나 제대로 알고 살아왔고 지금 이 순간에도 얼마나 제대로 알고 살고 있을까? 모르고 있는 내 자신을 깨치기 위해 다시 읽고 다시 생각할 일이다.
최강문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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