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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블로그]방관자와 감시자, 갈림길에 선 언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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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수 사회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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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한적한 산길을 가던 44번 버스가 2인조 강도들에게 습격을 당한다. 강도들은 승객들의 돈을 다 빼앗은 뒤 젊은 여성 운전기사까지 끌고 가 성폭행한다. 한 청년이 끝까지 막아 보려 애를 썼지만 중과부적이었다. 지켜보던 다른 승객들은 모두 모른 척 침묵했을 뿐이다.

반전은 이때부터다. 돌아온 여성 운전기사는 다짜고짜 자기를 도우려 했던 청년을 지목해 당장 내리라며 짐을 버스 밖으로 던져 버린다. 승객들도 빨리 목적지에 가겠다는 욕심에 청년을 쫓아낸다. 하는 수 없이 길을 걷던 청년의 눈에 처참한 교통사고 현장이 눈에 들어온다. 조금 전까지 타고 온 바로 그 버스다. 청년은 운전기사와 승객 모두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은 후 아연실색한다.
2001년 홍콩에서 제작된 '버스44'라는 영화의 줄거리다. 중국에서 실제 있었던 일을 영화화했다. 같은 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국내에도 소개됐다. 2014년 세월호 사고 후 사회적 방관·침묵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 지에 대한 자성의 물결이 일면서 다시 관심을 끌었다.

사회적 방관·침묵을 비판하는 일화·우화는 그 외에도 많다.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끌려가던 유대인들이 탄 기차 안에서 한 젊은이가 소리쳤단다. "내가 도대체 무슨 죄를 지었나, 나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는데 왜 나를 잡아가느냐." 그러자 조용히 앉아 있던 한 노인이 이렇게 말했다. "네가 아무 것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바로 세상이 이렇게 된 것이다."

나중에 오보임이 드러나긴 했지만 '제노비스 신드롬'도 대표적 사례다. 1964년 뉴욕에서 캐서린 제노비스라는 여성이 칼에 찔려 살해당했지만 이를 목격한 38명의 주민들이 신고하지도 도와주지도 않은 채 방관했다는 충격적 사건이다.
이 같은 사람들의 사회적 방관·침묵은 심리학적으로 방관자 효과(bystander effect)라는 개념으로 정리돼 있다. "목격자가 많을수록 책임감이 분산돼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돕지 않게 되는 현상"을 뜻한다. 이에 대해 사회 심리학자 필립 짐바르도는 "폭력을 외면하고 악을 고발하지 않는 것 또한 악(惡)"이라면서 "보이지만 보려하지 않고 들리지만 들으려 하지 않는 '침묵의 합창단'이 가장 중요하면서도 잘 알려지지 않은 악의 기여자"라고 말했다고 한다.

우리사회라고 다를까. '침묵의 합창단'은 도처에 널려 있다. 그 결과 세월호 사고 등 온갖 사회적 참사가 끊이질 않는다. 누구 탓일까. 일차적으로 시민의 눈과 귀 역할을 해야 하는 언론이 가장 큰 책임이 있을 것이라고 자성해 본다. 정의를 실현해야 하고 공정해야 할 공권력을 제대로 감시하지 못하고, 사실을 사실대로 알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 언론은 지금 아무 것도 하지 않다가 수용소로 끌려간 유대인 청년과 침묵하지 않은 덕에 죽음을 면한 버스44의 청년, 그 갈림길에 서있다.




김봉수 사회부 차장 bskim@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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