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의 말을 듣는 순간 묵직한 무언가가 가슴에 팍 하고 박혔다. '무죄'에서는 느낄 수 없는, '생존'이라는 단어가 주는 비장함이다. 며칠 전 점심식사 자리에서 만난 A는 외국계 금융사의 한국지사 대표다. 젊었을 적 금융권에 몸담아 줄곧 한 우물을 팠다.
여기 또 다른 변신이 있다. 한동안 보지 못했던 후배 B를 얼마 전 길에서 우연히 만났는데 까마득히 몰라볼 뻔 했다. 파마에 염색까지 거의 환골탈태 수준이었다. 자초지종을 물으니 외모가 사업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친구와 동료들의 권유가 발단이었다. 그래서 변신 후 사업은 잘 되고 있을까. B는 어색하게 웃으며 뒤통수만 긁적였다.
남자도 화장을 하는 시대에 파마와 염색(새치 염색이 아닌 멋내기 염색) 따위가 대수는 아니다. TV 드라마나 영화에 나오는 꽃중년의 영향 탓인지 '아저씨'를 거부하는 노무족(NoMUㆍNo More Uncle)이 늘어난다. 조선시대에도 관직에 오르는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으로 신언서판(身言書判)이 있었다. 생긴 것, 말하는 것, 쓰는 것, 판단하는 것 가운데 으뜸은 생김새였다. 좋은 인상이 대접받는 세태는 시대를 초월한다.
이정일 금융부장 jaylee@asiae.co.kr<후소(後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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