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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텔링 서울 45. 장충단(奬忠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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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잃은 황태자 순종의 글씨
외로운 비석 아직도 흐느끼는 듯

[아시아경제 이현우 기자]6월의 녹음이 푸르른 도심 공원의 오후는 한가로웠다. 자전거도로와 보행로가 연이어 나 있고 각종 운동기구와 발을 지압판까지 서울 시내의 여느 공원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풍경이다. 공원 한쪽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할아버지들이 한창 윷놀이 삼매경에 빠져있다. 그 바로 뒤편에 경로당 현판을 단 건물도 눈에 들어온다. 비둘기에 모이를 주는 할머니의 모습과 또 그 비둘기를 쫓으려는 손녀의 모습이 평화롭다.

하지만 공원의 가운데로 가면 분위기가 달라진다. 공원의 중앙 부분에는 나무가 없고 잔디밭 위에 비석 하나가 우뚝 서 있다. 평범해 보이는 이 공원을 다른 공원과 달리 보게 해 주는 것이 바로 이 비석이다. 비석에는 정갈한 전서체(篆書體)로 이 공원의 이름인 '장충단(奬忠壇)' 세 글자가 적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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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석의 앞면을 자세히 살펴보면 우측 상단에 '예필(睿筆)'이라는 단어가 보인다. 예필은 황태자나 왕세자가 직접 쓴 글씨를 의미한다. 글씨는 상하로 길고 곡선으로 뻗어 있어 호리호리한 남성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서예를 잘 모르는 사람이 봐도 분명 아름답게 보이는 글씨다.

그러나 양녕대군이 쓴 숭례문 현판을 떠올려보면 이 비석의 글씨는 아름답기는 하지만 강한 힘이나 기개가 느껴지진 않는다. 글자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는 뒷면의 내용을 보면 알 수 있다. 광무 4년 11월(光武 四年 十一月)이란 글씨를 통해 비석이 세워진 시기가 1900년이란 사실을 알 수 있고 앞서 살펴본 예필의 의미를 생각해보면 그 당시 황태자였던 조선의 마지막 왕 순종이 이 글씨의 주인임이 드러난다. 영정이나 사진을 통해 항상 호리호리한 모습으로 나온 순종을 떠올려보면 글씨가 사람을 닮는다는 말이 맞는 것 같다.

장충단을 글자 그대로 해석해본다면 '충성스러운 장수들을 위한 제단'이란 의미가 된다. 이름에 걸맞게 장충단은 본래 공원이 아니라 한국 최초로 지어진 '현충원'이었다. 남소영(南小營)이라는 군영으로 사용되다가 20세기의 첫 해인 1900년 9월, 을미사변 때 명성황후를 지키다 죽은 병사들을 추모하기 위해 지어졌다. 이후 매년 봄ㆍ가을에 제사를 지냈고, 그 때마다 오늘날 현충원에서 하듯 군악이 연주되고 군인들이 조총(弔銃)을 쐈다.
장충단은 이처럼 현충원이자 정치적 공간이었다. 이곳에 자리잡은 것부터가 '정치적' 입지 선정이었다. 남산 지도 위에서 현재 장충단 공원 서쪽으로 눈을 돌리면 남산을 끼고 회현동이 나오는 걸 볼 수 있는데 이곳은 임진왜란 때 왜장대(倭將臺)라 불리며 왜군이 주둔했던 곳이자 1900년 당시에는 일본공사관이 위치했던 곳이다. 구한말 일본인들이 집결해 살아 마을을 형성할 정도로 서울에서 일본의 입김이 가장 강했던 곳, 고종은 일부러 이런 곳을 골라 명성황후 시해 당시 전몰장병들을 추모하기 위한 장충단을 지은 것이다.

입지뿐 아니라 1900년 9월이라는 건립시점도 큰 의미를 지닌다. 장충단을 건립하기 한달 전인 8월에 중국 청나라의 수도 베이징(北京)은 영국, 프랑스, 일본, 러시아 등 8개 열강 군대에 의해 함락되었고 이로 인해 중국의 의화단 운동은 실패로 돌아갔다. 전쟁이 진행되는 동안 러시아는 만주를 점령하고 동북아에서 그 어느 때보다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됐다. 이런 시점에 지어진 장충단은 일본 세력이 상당히 위축된 시점에 일본의 침탈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의지의 상징이었다.

이런 의미를 지닌 곳이기에 대한제국 멸망 이후 일제는 이곳을 철저하게 훼손했다. 일제는 1920년대 후반부터 이곳에 자국의 국화인 벚나무 등을 대거 심어 공원으로 만들었다. 나아가 1932년에는 공원 동쪽에 '박문사(博文寺)'라는 사당이 세워졌다. 바로 안중근 열사에 의해 저격된 한일 강제병합의 '주역' 이등박문(이토 히로부미)를 추모하기 위한 사찰이다. 사찰이 자리잡은 언덕은 춘무산(春畝山)이라고 명명했다. 춘무는 이토의 호다. 이토의 23주기 기일인 1932년 10월 26일에 열린 낙성식에는 조선 총독 우가키 가즈시게 외에 친일 부역자들인 이광수, 최린, 윤덕영 등이 대거 참석해 이토의 혼령에 머리를 숙였다. 1937년에는 일본군 육탄3용사의 동상을 세워 대륙침략을 위한 '정신기지'로 삼기도 했고, 2년 뒤에는 이토를 포함해 이용구, 송병준, 이완용 등 한일 병합 공로자를 위한 감사 위령제가 열리기도 했다. '장충(奬忠)'의 의미는 이렇게 완전히 지워져버렸다.

광복 후 장충단 공원의 역사는 이 같은 일제의 흔적을 지우고 본래의 '장충'을 회복하는 과정이었다. 육탄삼용사 동상과 박문사가 바로 철거되었고 벚나무도 뽑혀졌다.
장충단비의 의미를 되새겨주는 공원 안팎의 동상과 기념비들은 모두 광복 후에 세워진 것들이다. 장충단비에서 공원 안쪽으로 들어가면 헤이그에서 순국한 이준 열사의 동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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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 열사의 동상은 오른손을 주머니에 깊게 찔러넣고 왼손에는 두루마기 문서를 하나 든 채 정면을 응시하는 모습으로 서 있다. 열사의 시선이 향하고 있는 정면이 바로 이토 히로부미의 명복을 빌던 박문사가 있던 자리다.

조금 더 공원 외곽을 따라 돌면 이한응 선생의 기념비도 볼 수 있다. 이한응 선생은 구한말의 외교가로 영국 런던에서 서리공사(임시공사)로 활동하며 한국의 독립을 위해 노력했고 1905년 5월 조국의 멸망이 눈앞으로 다가오자 열사들 중에서 가장 먼저 목숨을 던진 의인이라는 설명이 비석에 나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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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외에도 1919년 파리강화회의에 유림대표들이 한국의 독립에 대한 서한을 보낸 것을 기념하는 한국유림독립운동파리장서비, 유관순 열사의 동상도 세워져 있다.

장충단 공원은 그래서 구한말과 일제 식민통치기의 우리 독립운동의 역사 박물관이다. 침략의 역사를 반성하지 않는 일본 극우세력이 다시 기승을 부리는 요즘, 장충단 공원 옆 도로변의 벚나무들도 괜히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다.




이현우 기자 knos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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