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Dim영역

[이 책 어때]1차 세계대전, '긴축'을 낳다

뉴스듣기 스크랩 글자크기

글자크기 설정

닫기
인쇄 RSS
[이 책 어때]1차 세계대전, '긴축'을 낳다
AD
원본보기 아이콘

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15년 7월2일, 영국에서 군수조달법이 제정됐다. 군수부는 군수 물자 생산에 필요한 모든 민간 사업체를 통제할 수 있는 권한을 얻었다. 민간 사업체의 이윤을 제한할 수 있는 권한도 확보했다. 이탈리아에서는 왕실이 이보다 앞선 6월26일 비슷한 내용의 칙령을 발표했다. 전쟁 물자를 생산할 수 있는 모든 민간 사업체를 '예비 공장'으로 분류할 수 있는 권한이 정부에 부여됐다.


기존 자본주의의 가치에 반하는 조치들이었다. 산업혁명과 함께 태동한 자본주의는 국가의 개입을 최소화하는 자유방임을 원칙으로 하고 있었다. 클라라 마테이 더뉴스쿨 경제학과 교수는 저서 '자본 질서(The Capital Order)'에서 "1차 세계대전을 기점으로 국가는 재정·통화·산업 방면에 막강한 힘을 행사했다"고 썼다. '자본 질서'의 첫 장 제목이 '1차 세계대전과 정부의 경제 개입'인 이유다. 더뉴스쿨은 미국 뉴욕의 진보 성향 대학교다.

마테이 교수는 1차 세계대전이 자본주의의 흐름을 크게 바꿨다고 진단한다. 특히 이 시기 오늘날 정부의 주요 경제정책 중 하나인 긴축 정책이 태동했다고 주장한다. 마테이 교수가 말하는 긴축 정책의 범위는 꽤 넓다. 통상적으로 긴축을 의미하는 기준금리 인상을 비롯해 공교육ㆍ의료보험ㆍ실업수당 등 복지지출 예산 삭감, 역진세(逆進稅, 물량이 많아지면 세금을 내려주는 것), 디플레이션, 민영화, 임금 억제, 고융규제 완화 등이 포함된다. 마테이 교수는 정부가 재정이 부족할 때면 이런 조치들을 취해 공공재 혜택을 줄이고 국민들에게 피해를 입혔다고 주장한다. 그는 영국과 이탈리아의 정치·경제 흐름을 살피며 긴축 정책이 태동한 근원을 살핀다.


영국에 주목한 이유는 산업혁명이 태동해 1차 세계대전 전 대표적인 자본주의 국가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1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영국에서는 광범위한 국영화가 이뤄졌다.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물자 조달이 쉬워야 했고, 국가가 전면에 나서게 됐다. 국가는 노동자의 자유와 임금까지 통제했다.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임금이 정치적 선택에 의해 결정된다고 자각하기 시작했다. 정부는 노조 대표들의 협력을 얻어야 했고 노조는 정치적 지위를 확보해나가기 시작한다.


영국에서는 전쟁이 끝난 1918년 선거법이 개정됐다. 재산에 상관없이 모든 남성이 참정권을 획득했고 제한적으로나마 여성도 참정권을 얻었다. 유권자 수가 개정 전 520만명에서 1290만명으로 두 배 이상 급증했다. 노동당은 전쟁 전보다 여덟 배 많은 450만표를 얻으며 자유당을 밀어내고 보수당과 함께 양대 정당의 지위를 확보했다.

1919년 이탈리아 총선에서도 전통의 자유당이 몰락하고 사회당과 인민당이 과반 의석을 차지했다. 마테이 교수가 이탈리아에 주목한 이유는 긴축 정책과 파시즘의 상관관계 때문이다. 그는 긴축이 빨리 성과를 내려면 국가주의 정신을 강력하게 주입할 수 있는 하향식 파시즘 정부가 적격이었다고 설명한다. 또 파시즘 정부도 통치자의 지배를 확고히 할 수단으로 긴축이 필요했다고 주장한다. 실제 베니토 무솔리니는 1922년 11월 첫 의회 연설에서 검약, 근면, 규율을 강조하는데 이는 긴축의 주요 가치와 부합했다.


전쟁을 계기로 정치적으로 자각한 노동자들은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의 변화를 원했다. 전쟁을 계기로 영국 주요 정당으로 부상한 노동당의 당시 강령은 생산수단의 장악이었다. 노동자들과 함께 기존 자본주의 질서에 위협이 되는 존재는 재건주의자들이었다고 마테이 교수는 설명한다. 재건주의자란 새로운 사회정책을 옹호하고 이를 통해 더욱 평등한 사회를 이룩할 수 있다고 믿는 관료와 진보적 엘리트층을 일컫는다. 영국과 이탈리아 정부는 1차 세계대전 동안 정치적 결속을 위해 대규모 사회복지정책을 활용했는데 재건주의자들은 전쟁 이후에도 이 전략을 더욱 강력히 밀어붙이려 했다.


반면 기존 자본주의 질서를 유지하려는 세력들도 등장했다. 마테이 교수는 1920년 브뤼셀과 1922년 제노바에서 열린 최초의 국제 재정회의에 주목한다. 정치인이 거의 배제된, 따라서 노동계급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는, 재정ㆍ경제 전문가들의 회의였다. 이 회의에서 국가의 재정지출과 노동계급의 소비지출을 줄여야 한다는 검약과 노동자의 근면이 강조됐다. 마테이 교수가 주장하는 오늘날 긴축의 핵심 원칙들이다.


마테이 교수는 긴축이 시작된 계기를 1999년 영국의 광산 국유화 논쟁에서 찾는다. 당시 문제를 논의한 생키 위원회 13명 위원 중 과반인 7명이 국유화에 찬성했다. 하지만 정부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무부 전문가들이 국가 재정을 이유로 압력을 행사했기 때문이었다. 정부는 광부들의 요구가 사회에 해롭다며 반대했다. 이때 영국 정부가 국유화에 반대한 논리가 오늘날 긴축을 옹호할 때 내세우는 근거의 시초격이라고 마테이 교수는 주장한다. 이후 재정 전문가들의 행동이 구체화된 것이 잇따른 재정회의였다. 1922년 제노바 재정 위원회의 의장은 영국 보수당 소속 워딩턴-에반스 장관이었다.


저자는 2차 세계대전 이후 30년도 채 안 되는 경제 호황기를 제외하면, 항상 긴축 정책이 지난 100년의 현대 자본주의를 지배했다고 주장한다. '자본 질서'를 감수한 홍기훈 홍익대 교수는 이야기의 구성이 훌륭하고 긴축에 대한 새로운 논의의 출발점을 제시했다는 점을 높이 평가했다. 다만 일부 주장이 지나치게 특정 관점에 치우친 측면이 있고 결론이 음모론의 관점에서 해석될 소지도 있다는 평이다.


자본 질서 | 클라라 마테이 지음 | 임경은 옮김 | 21세기북스 | 492쪽 | 2만8000원





박병희 기자 nut@asiae.co.kr
AD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함께 본 뉴스

새로보기

이슈 PICK

  • 하이브, 어도어 이사회 물갈이…민희진은 대표직 유임 (상보) 김호중 검찰 송치…음주운전·범인도피교사 혐의 추가 [포토] 북한탄도미사일 발사

    #국내이슈

  • 트럼프 "나는 결백해…진짜 판결은 11월 대선에서" "버닝썬서 의식잃어…그날 DJ는 승리" 홍콩 인플루언서 충격고백 안개 때문에 열차-신호등 헷갈려…미국 테슬라차주 목숨 잃을 뻔

    #해외이슈

  • [포토] 일주일 앞으로 다가온 현충일 [이미지 다이어리] '예스키즈존도 어린이에겐 울타리' [포토] 시트지로 가린 창문 속 노인의 외침 '지금의 나는 미래의 너다'

    #포토PICK

  • 베일 벗은 지프 전기차…왜고니어S 첫 공개 3년간 팔린 택시 10대 중 3대 전기차…현대차 "전용 플랫폼 효과" 현대차, 中·인도·인니 배터리 전략 다르게…UAM은 수소전지로

    #CAR라이프

  • [뉴스속 용어]심상찮은 '판의 경계'‥아이슬란드서 또 화산 폭발 [뉴스속 용어]한-UAE 'CEPA' 체결, FTA와 차이점은? [뉴스속 용어]'거대언어모델(LLM)' 개발에 속도내는 엔씨소프트

    #뉴스속OO

간격처리를 위한 class

많이 본 뉴스 !가장 많이 읽힌 뉴스를 제공합니다. 집계 기준에 따라 최대 3일 전 기사까지 제공될 수 있습니다.

top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