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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며 생각하며]<택시운전사>와 ‘공범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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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채훈 전 MBC PD·클래식 해설가

이채훈 전 MBC PD·클래식 해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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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 80년 5월 광주, 민주주의를 요구했다는 이유만으로 무고한 시민들이 살육당했다. 다름 아닌 우리 국군의 총칼과 곤봉으로…. <택시운전사>는 이 때 언론이 어떻게 국민의 눈과 귀를 가렸는지, 그리하여 어떻게 맘 놓고 학살을 자행하도록 방조했는지 보여준다.

택시운전사 김만섭(송강호 분)은 밀린 월세 10만원을 벌기 위해 광주행을 택한다. 시위 학생들을 향해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데모만 한다”며 역정을 내던 만섭은, 광주의 참상을 목격한 뒤 언론이 거짓을 주입하고 있다는 걸 깨닫게 된다. 위험을 무릅쓰고 진실을 전하려는 힌츠페터 기자의 의지에 감동한 그는 결국 현장을 지킨다. 영화는 권력에 눈먼 신군부 뿐 아니라 언론, 특히 공영방송이 5월 광주를 짓밟은 ‘공범자들’임을 자연스레 일깨워 준다.
5월 광주를 다룬 숱한 영화들 - <오 꿈의 나라>, <꽃잎>, <화려한 휴가> 등 - 에 비해 퇴행적인 작품 아니냐는 지적이 나왔다. 이명박 · 박근혜 집권 9년 동안 광주의 진실이 가려지고 왜곡당한 결과라는 평론가의 한탄에 공감할 지점이 없지 않다. “5 · 18이 북한군의 소행”이라는 가짜뉴스가 판을 치고, 억울하게 희생된 사람들을 홍어에 비유하는 패악이 벌어졌다. “발포 명령은 없었고, 자신이 오히려 피해자”라는 전두환의 자기합리화가 버젓이 ‘회고록’이란 이름으로 출판됐다. 이 상황에서 <택시운전사>가 좀 더 대중적인 시선으로 5 · 18을 다룬 건 결코 평가절하할 일이 아니다.

<택시운전사>가 80년 5월의 언론을 비추고 있는 지금, 이 나라의 공영방송은 어디에 있는가? 영화 속, 힌츠페터 기자를 환영하는 광주 시민들의 모습은 jTBC에 환호하고 KBS · MBC 기자를 야유하던 촛불시민들과 오버랩된다. “현장에 가는 게 기자의 당연한 의무”라는 힌츠페터의 대사는 세월호 현장의 목소리를 무시한 채 “전원 구조” 오보를 내서 초반 구조작업에 차질을 빚게 한 MBC의 무책임과 대조된다. 공영방송이 ‘권력 감시’라는 제 역할을 다했다면 박근혜 · 최순실 국정농단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형광등 100개의 아우라”라는 찬양과 현란한 패션 외교에 국민들의 시선이 묶여 있는 사이, 국정농단의 해악은 독버섯처럼 사회 구석구석으로 퍼져 나갔다.

MBC 해직 PD인 최승호 감독이 취재한 <공범자들>이 오늘 개봉된다. 이명박, 박근혜 정부 9년 동안 MBC에서 벌어진 참혹한 언론유린의 책임자들을 추적한 다큐멘터리다. 전두환의 5공화국은 언론에 재갈을 물리기 위해 ‘보도지침’을 내린 반면, 이명박 · 박근혜 정부의 ‘공범자들’은 스스로 기자 · PD들에게 재갈을 물렸다. 이들의 비호 아래 아무 거리낌없이 국정농단을 자행한 박근혜 전대통령은 파면되고 구속됐다. 그러나 정작 이 ‘공범자들’ - 특히 MBC 김장겸 사장과 백종문 부사장, 방송문화진흥회 고영주 이사장 - 은 물러나기는커녕 여전히 MBC를 사유화한 채 기자 · PD들을 겁박하고 있다. 이 여름의 공영방송은 국민들의 눈과 귀를 가린 채 무고한 시민들을 살육한 80년 5월의 방송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이들은 언론자유를 요구하는 200여명의 기자 · PD · 아나운서들을 징계하고 비제작부서로 유배시켰고, 법원의 부당해고 · 부당징계 · 부당전보 판결을 무시한 채 똑같은 노동탄압을 되풀이했다. 이들은 박근혜 탄핵, 6월항쟁 30년 다큐멘터리 제작을 가로막았고, <PD수첩>에 대해 △세월호 유가족 우는 장면 삭제 △ 백남기 농민 아이템 불허 △국정원 아이템과 4대강 녹조 취재 금지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탄압을 가했다. 이들은 한상균 민주노총 위원장 구속을 축으로 우리 노동현실을 되돌아보는 기획을 묵살하며 “민주노총 산하 언론노조 조합원인 PD들이 노동문제를 취재하는 건 형평성이 없다”며 ‘민주노총 청부취재’라고 모욕했다. 참다못한 시사제작국 기자 · PD들의 제작거부 투쟁이 한달 가까이 지속되고 있다. ‘공범자들’은 이 PD · 기자들에게 중징계를 예고했고, MBC는 또 한 번 대량해고의 암운에 휩싸였다.

영화 <택시운전사>는 1980년 5월, 광주 MBC가 성난 시민들에 의해 불타오르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 장면은 공영방송이 시청자들의 신뢰를 잃으면 어떻게 되는지 보여주는 상징으로 방송인들의 무의식에 각인돼 있다. 2017년 8월, 공영방송 MBC는 시청자들의 분노, 그 임계점을 넘어서려 하고 있다. 어떻게 할 것인가. 원래 ‘공영방송(public station)’은 ‘우리 모두의 방송’이란 뜻이다. 방송 종사자들의 내부 저항만으로는 힘겨워 보인다. 매주 금요일 저녁, ‘돌마고(돌아와요 마봉춘 고봉순) 불금파티’가 두 공영방송 사옥 앞에서 열리고 있다. ‘공범자들’이 무단점유하고 있는 공영방송을 되찾으려면 방송의 주인인 시민들이 팔을 걷어붙이고 촛불을 들어야 한다.

이채훈 前 MBC PD, 클래식 해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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