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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초의 母語 되살리는 8순 시인의 열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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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통한 약사' 출신 김두환, 11번째 시집 내다

고 서정주 시인 추천으로 등단
사라져가는 우리말 연구가 詩作 원천


 서울 종로구 조계사 맞은편 골목 안에 있는 김두환 시인의 사무실에 들어서면 먼저 볼 수 있는 것은 우리말 사전에 고개를 파묻고 들여다보는 모습이다. 사전은 온통 손때가 묻어 있고 닳아 있다. 그렇게 헤져서 바꾼 '우리말 큰 사전'만 벌써 세 질이다. 우리말 사전은 그에게 시작(詩作)의 원천이고 학교이며 경전이다. 우리 나이로 올해 여든 살. 뒤늦게 시인의 길로 들어선 지 30년이 가까워지는 이 노(老) 시인이 사전을 뒤적이며 시어를 찾느라 몰두하는 모습에선 어느 청년보다 더 푸르른 청년, 어느 학생보다 더 학구적인 학생이 느껴진다.
최근 나온 11번째 시집 '그대도 물결치는가'의 맨 앞에 실린 시 '한 송이를 배운다'를 보자. '깔밋이(모양 차림새가 간단하고 아담하며 깨끗하다)' '숫접고(순박하며 수줍어하는 티가 있다)' '숭굴숭굴하고(성질이 수더분하고 원만하다)'와 같은 말들이 눈에 띈다. 왜 그를 가리켜 '사라져가는 말들을 찾아 태초의 모어(母語)를 되살리고 있는 시인'이라고 하는지 알 만하다.
 "맛깔스럽고 다양한 어찌씨(부사)나 꾸밈씨(형용사)가 너무나 많아요. 그것을 하나하나 캐내 시어로 만드는 작업을 내가 한다는 것이 얼마나 보람이 있는지 모르겠어요."

 단 하나의 시어를 고르기 위해서 어떤 때는 꼬박 몇 달을 고민하기도 한다. 그의 우리말 사랑은 보답을 받아 '오매 단풍 들것네' '모란이 피기까지는'을 쓴 김영랑 시인을 기리는 '영랑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원래 그의 본업은 약사였다. 그것도 아주 '신통한 약사'였다. 약대를 졸업한 그는 수도육군통합병원에서 약재관으로 군복무를 할 때 출장 진료 나온 서울대병원 의사들의 어깨 너머로 피부병 전문치료를 배웠다. 전쟁 직후 피부병이 만연하던 시절이었다. 그는 피부병 치료 연고를 제조했고, 그 연고는 백발백중의 특효가 있었다. 서울 낙원동에 차린 약국은 피부병 전문으로 소문이 나서 환자들이 문전성시를 이뤘다. 약국 문을 밤 12시에나 닫아야 할 정도였다. 그만큼 돈도 많이 벌었다.
 그러나 마음은 늘 허전했다. 뭔가 더 가치 있는 일을 하고 싶었다. 틈만 나면 시상(詩想)에 잠겼다. 87년 나이 50이 넘어서 서정주ㆍ박재삼 시인으로부터 '한국시' '문학세계'지 추천을 받아 시인으로 등단했다.
 나이 들어 새로운 길에 들어선 것 같지만 원래 예정됐던 길을 찾은 듯도 하다.

 "대학 다닐 때 점심을 굶어야 할 때가 많았어요. 점심시간이 되면 친구들 몰래 창경원(지금의 창경궁)으로 들어가 혼자 물 마시며 팔베개를 하고 하늘을 쳐다보며, 당시(唐詩)를 원문으로 읽곤 했어요. 그때 암송하던 당시가 약대 출신인 저를 평생 시인의 길로 이끈 게 아닌가 싶어요."
 김 시인이 당시를 술술 읽을 수 있었던 것은 집안이 대대로 서당훈장댁이었기에 가능했다. 한문에 능통한 그가 오히려 사라져가는 우리말을 찾아내 시를 통해 되살리는 작업을 하고 있는 것이 역설적인 듯하지만 그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말이 참 섬세해요. 가령 '아름답다'는 영어로 'Beautiful'이라는 한 단어로 표현이 되지만 우리말로는 '아리땁다', '곱다'처럼 저마다 다른 느낌을 주는 표현으로 나뉘거든요."

 그는 지금도 어떤 단어가 생각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잊어먹지 않기 위해 노트에 적어놓는다고 한다. 깨알만한 글씨로 온갖 아름다운 우리말을 적어놓은 노트도 보여준다. 8순의 나이에도 꺼지지 않는, 아니 더욱 '솟구는'(시 '보리밭 읽노라니' 중) 이 청년의 부지런한 공부, 부지런한 시작(詩作)을 많은 이들이 지켜보고 있다.

이명재 논설위원 prome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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