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태공원 변한 곳엔 '환경'을 바라보는 시대상의 변화 담아내
자본으로 포장된 현실 속 허구 보여
[아시아경제 오진희 기자] 잿빛 언덕 위에 초록 수목들이 듬성듬성 자라나고 있다. 자욱한 안개로 가려진 이 장면은 마치 컴퓨터그래픽으로 만들어진 가상 영상 같다. 멀리서는 현대식 시멘트 건물들이 희미하게 보인다. 사진 속 장소는 한때 석탄 산업으로 영광을 누렸던 강원도 정선 사북이다. 전설의 엘도라도였던 사북은 사라졌고, 그곳엔 석탄더미와 오염된 갈빛의 강이 방치돼 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석탄 더미에 나무와 풀이 자라났다. 검은 산은 초록 잎이 반짝이며, 비현실적인 풍경을 만들어낸다. 작가 이다슬(36)은 "어떤 지역이 지닌 시간성 또는 속도를 보고자 했다"며 "기준은 자연이며, 이 지역의 사람들의 속도는 어떻게 다를지 그 간극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싶었다"고 했다. 작가는 3년 전부터 고향인 제주에 정착해 제주의 속도와 변화상을 찍고 있다.
공간과 시간을 떠도는 탐험. 이를 예술작품으로 소개하는 젊은 작가들. 최근 열린 '유랑(流浪)'전시는 특정 장소에 대한 탐구와 그곳에서 발견한 현실 그리고 허구를 마주하는 장이다. 기획자 임보람(여·37)은 "사북 풍경사진에서 보듯, 사북은 자본이 떠나면서 나무가 자라고 있지만, 이 인근엔 '강원랜드'라는 카지노가 들어서며 엘도라도의 환상은 사라지지 않고 있다"며 "이런 환상 또는 허상의 실체는 바로 '자본'"이라고 했다.
'기록과 복원'의 허구를 담아낸 작품도 만날 수 있다. 작가 안건형(40)은 서울 홍제천 일대 복원 역사를 기록에 비춰 추적해나가는 60분짜리 다큐멘터리를 상영했다. 영상에는 옛 기록에 나온 문구들과 해당 장소의 과거와 현재의 모습이 연결돼 있다. 그런데 이 영화는 기록을 통해 복원과정을 검증해 나간다기 보단, 반대로 학술논문이나 관공서의 자료에 인용된 내용들이 사실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다. 안 작가는 "도시학자 최종현 선생께 자문을 많이 구했다. 옛 기록들은 당시의 어떤 정치적인 계산 때문에 만들어진 것이 많았던 것 같다"며 "시대마다 홍제천을 바라보는 관점이 다르다. 처음에는 황무지였다가, 시간이 지나 사람들의 오물과 폐수를 방출할 수 있는 장소로, 그러다 냄새가 나니까 둑을 쌓고 생태공원으로 만들어갔다. 환경을 바라보는 시대상의 변화다. 앞으로는 관동팔경을 소재로 해 여러 이야기들을 수집하고 재해석해 작업으로 만들어 볼 것"이라 했다.
일본 작가 츤(34)이 제작한 '오히사마 단지'는 가상의 아파트 4개 동 안에 각 세대별로 캐릭터와 주민명부를 넣은 모형작품이다. 현대의 상징적 건축물인 아파트는 외양상 모두 같은 공간에 존재하는 삶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각각의 세대는 개별적 삶이 있고, 다른 스토리가 꾸려진다. 주민명부에는 각기 다른 방주인들의 사고, 삶의 방식, 살아온 인생 등이 적혀 있다. 작가는 작품을 통해 현대인의 삶을 비꼬는 듯하면서도 동시에 꿈과 동화의 이야기를 불어넣고 있다. 츤 작가는 재작년 임 기획자와 일본 구마모토 예술인 마을에서 인연을 맺은바 있다. 이곳에서도 장소성을 주제로 해 태평양 전쟁 이후 버려진 마을에 대한 조사와 스토리와 관련한 전시가 열린 바 있다.
오진희 기자 valere@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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