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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재 칼럼]'정신적 미성년자' 선조의 패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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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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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을 '승리한 전쟁'으로 봐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왜군 3분의 2가 희생됐으니 패전이 아닌 승전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그 말에 일말의 진실이 있다. 그러나 설령 일본군을 단 한 명도 살려서 돌려보내지 않았다 하더라도 과연 그걸 승전이라고 할 수 있을까. 수천 년간 지켜온 민족의 자존이 처참히 짓밟힌 치욕, 산천이 도륙당한 굴욕을 생각한다면 어떤 압도적 승리였던들 결국 패배였을 뿐이다.

이 전쟁의 가장 큰 패배자는 임금인 선조였다. 그러나 그것은 그가 당시의 왕이었기 때문만이 아니다. 오히려 무능한 왕의 대명사, 오욕의 군주로 불리며 온갖 비난을 받는 것의 과도함 때문이다. 지금 방송되는 드라마도 그렇지만 그는 늘 혼군(昏君)으로 매도된다. 가령 이 드라마는 왜란에 대비를 해야 한다는 서애의 말에 "아직도 왜변이 일어날 것이라 믿는가"라고 일축하는 것으로 묘사하지만 '선조실록' 등이 전하는 사실(史實)은 그와 다르다. 그는 오히려 외침을 받을 걸 염려하고 신하들을 다그친다.
어찌 보면 임란 발발이나 조선의 무방비는 불가항력이었다. 태평양 건너편의 지리상 발견의 뱃길이 일본으로 상륙해 전해진 철포에다 전국시대를 끝내고 통일되면서 칼날이 더욱 벼려진 일본도가 합세해 노도(怒濤)를 이루는 동안, 4번의 사화(士禍)로 나라의 동량들을 떼죽음시키며 스스로 제 기력을 쇠진시켜 온 나라를 16세의 나이에 넘겨받은 선조에게 왕위 등극은 축복이 아니라 예정된 고난의 시작이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선조에게 동정을 보내야 할까. 분명 선조를 위한 변명이 필요하다. 그러나 동정이 1이라면 탄핵은 10이어야 할 것이다. 위기는 그 자체로 위기가 아니기에 '위기가 올 걸 알면서도 대비하지 않는 하지(下智)'에 머무른(율곡) 그의 과오를 연민으로 덮을 수는 없다. 다만 선조의 패배는 과연 무엇이었을까라는 질문이 필요하다. 그의 패배는 군주로서의 패배 이전의 것이다. 그의 실패는 퇴계와 율곡의 염원대로 성군(聖君)이 되지 못해서가 아니었다. 선조의 패배, 선조의 불행은 그가 임금 이전에 어른이 되지 못했다는 것에 있었다. 그는 타인에 대한 권력을 얻었지만 자신에 대한 권력은 갖지 못했다. 만인의 군주였지만 자신의 군주가 되지는 못했다. 이순신과 김덕령을 누명 씌워 투옥하고 참혹한 죽음에 이르게 할 때 보인 질투와 옹졸함, '정여립의 난' 때 직접 심문관이 돼 젖을 겨우 뗀 아이조차 돌로 으깨 죽이는 사형을 자신의 앞에서 행하게 할 때 이를 보던 이들이 그 끔찍한 광경에 고개를 돌려야 했다는 기록에서 보이는 잔혹함, 세자의 책봉을 건의한 것에 발끈해 충신이라 총애했던 정철을 하루아침에 내쫓는 그 표변성, 그것은 폭정이라기보다 광기였고, 광기라기보다는 치기(稚氣)였다. 자기를 다스리지 못한, 정신적 미성년의 치기였다. 그 미성년과 치기로 인해 그는 임란 이전에 이미 '패잔 군주'였다.

그 미성년의 왕의 통치가 조선 왕들 중 4번째로 길었다는 것이 조선의 불행이었다. 그래서 '200년 고옥(古屋)'의 나라지만 '목릉 성세'로 불릴 만큼 뛰어난 인재들과 함께 중흥의 40년간으로 만들 수도 있었던 기회를 민족사의 재앙의 연대로 만들어버리고 말았다. 퇴계와 율곡이 자신의 지성의 집대성으로 수신과 경세의 진언을 할 때 군주로서의 선조는 그걸 갈망했지만, 미성년으로서의 선조가 그걸 거부했다. 머리가 하려는 일을 가슴이 막았다. 인격의 불구(不具), 품성의 불구가 그를 혼군에서 깨어나지 못하게 했다.
결국 옥좌에 앉고 보관(寶冠)을 쓴다 해서 진정한 군주가 되진 못한다. 진정한 군주, 명실상부의 통치자가 되기 위해선 무엇보다 일단 어른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선조는 교훈으로 남긴다. 그것이 비단 저 조선 시대, 왕이 다스리던 시대에만 해당되는 얘기는 아닐 것이다.






이명재 논설위원 prome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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