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대 금석학 연구대상 '고려사' 필사본, 영국서 발견

케임브리지대학 도서관 소장 '고려사' 137권 19책

[아시아경제 오진희 기자] 중국 청대 최고의 금석문 학자 유희해(1793~1852년)가 우리나라 금석물들을 모은 '해동금석원(海東金石苑)'을 펴는 데 참고한 필사본 '고려사(高麗史)' 전질이 영국 케임브리지대학 도서관에서 발견됐다. 단정한 해서체로 필사된 이 책은 청나라 금석학자들이 조선의 금석문을 얼마나 열심히 연구했는지를 보여주는 자료다. 또한 고려사 필사본은 전질을 필사한 것이 드물어 희소성 면에서도 가치가 높다.

고려사는 김종서·정인지 등이 1449년 세종의 명을 받들어 편찬하기 시작해 1451년 139권으로 완성한 기전체(紀傳體) 사서(史書)로 현재 대부분 목판본으로 전하고 그 다음으로 금속활자본이나 목활자본이 많다. 총 글자 수 336만9623자에 달하는 고려사 필사본의 경우, 열전이나 지(志) 부분만을 필사한 것들이 대부분이고, 전질을 필사한 경우는 규장각 소장 61책과 콜레주 드 프랑스 소장 71책 등이 있을 뿐이다.

이번에 발견된 케임브리지대학 도서관 소장 고려사 필사본은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이 지난해 실시한 ‘구한말 해외반출 조선시대 전적 현황 조사 연구’ 과정에서 이뤄졌다. 조사단의 허경진 연세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는 케임브리지대학 도서관의 '웨이드 문고(Wade Collection)'의 서가를 살펴보던 중 양장(洋裝) 제본의 책등에 “KAOLI SHIH”라고 표기된 19책을 우연히 발견했다. 이 서적을 기증한 토마스 웨이드(Thomas Francis Wade, 1818~1895년)는 주청 영국공사를 역임하면서 중국 고서만을 전문적으로 수집하였는데, 그의 기증도서 속에 한국 고서들이 섞여 있었던 것이다. 또한 이 책이 괘선지에 해서체로 쓰여진 필사본 고려사 전질이며 19세기 중국 학자들이 애장하며 돌려보았던 것임을 확인했다.

권137 뒤에는 옹수곤이 여덟 상자나 되는 분량을 빌려다가 집에 있던 소장본과 대조하는 데 108일이나 걸렸다는 내용을 덧붙였다. ‘성원상관(星原嘗觀)’은 성원(옹수곤의 자)이 읽어보았다는 뜻이다.

당시 청대 금석학자들은 고려사 안에 담긴 비문(碑文) 또는 문자에 관한 내용을 발췌하고 연구했다. 특히 이 책은 청나라 학자들이 조선 금석문을 탐구하기 위해 고려사를 얼마나 소중하게 여기며 구입하거나 필사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필사본 책 첫 권의 고려사 서문에 해당하는 '진고려사전(進高麗史箋)' 위에 찍힌 인장은 해동금석원의 편저자인 유희해의 것으로 밝혀졌다. 또 '진고려사전'이 끝나는 부분에는 옹수곤(1786~1815년)이 “1813년 12월부터 교열하면서 읽다가 목록에서 빠진 부분을 보완한다”는 글을 덧붙였으며, 권137 뒤에는 “여덟 상자나 되는 분량을 빌려다가 집에 있던 소장본과 대조하는 데 108일이나 걸렸다”고 적어놓았다. 당시 옹수곤과 유희해는 고려시대 금석문 연구에 몰두하며 조선 사신이 오갈 때마다 탑본을 부탁했고, 글자를 판독하고 고증하기 위해 고려사를 구해 대조해가며 읽고 있었던 것이다. 허경진 교수는 “옹수곤과 유희해는 조선 금석문을 연구하면서 상당한 분량의 탑본을 수집해 원문을 해독하고 제작 배경을 고증하고 있었다”며 “유희해가 해동금석원을 편집할 때 이 책을 한 글자씩 대조하면서 활용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옹수곤은 추사(秋史) 김정희(1786~1856년)가 북경에 가서 만났던 스승이자 중국의 이름난 금석학자인 옹방강의 아들로 추사와 동갑내기 친구이기도 하다.

그동안 고려사는 국내외 많은 기관에 소장돼 흔한 자료로 분류돼 자세한 조사가 생략돼 왔다. 신승운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장은 "이번 발굴처럼 국외에 있는 전적들을 꼼꼼히 조사해보면 자료의 특징은 물론, 장서인을 통해 소장자 정보 및 반출경위 등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오진희 기자 valere@asia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