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간 목적지인 구마모토 성까지 가는 데에는 버스로 약 두 시간이 걸린다. 시간을 때우려는지 가이드는 습관처럼 마이크를 잡는다. 일본의 개요에 대해 짚고 나더니 역사적 인물에 대한 에피소드로 흥미를 돋우었다.
판에 박힌 설명이 지루해질 무렵 차츰 졸리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뒤쪽에서 뜬금없는 질문에 가이드의 이야기가 옆으로 샜다. 일본은 살 만하느냐고 물어본 모양이다. 일본은 물가가 멈춘 지 오래돼서 그럭저럭 살 만해요. 잃어버린 20년 덕분이지요. 일본 경제에 대한 가이드의 소감 피력이 내 귀를 솔깃하게 했다.
그래도 일본이 장기불황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중소기업과 개인기업들이 강하기 때문이라고들 해요. 중소기업 중에는 세계적으로 내로라하는 기술을 가진 업체들도 많아요. 가령 깨알 같은 은단에 은박을 입히는 기술만 해도 대기업이 아닌 중소기업이 가졌어요. 대를 이어 장인정신을 발휘하는 개인기업들도 대기업에 흡수되지 않고 독자적으로 살아가죠. 소수의 재벌에 의존하는 한국경제와는 달라요.
우리 경제도 어느새 불황의 터널을 8년째 접어들고 있다. 리먼 사태 이후부터 경제위기를 계산하면 그렇다. 소위 대(大)디플레의 시기라고들 한다. 이를 견뎌낼 수 있는 나라로 손꼽는 독일과 대만을 보면 중소기업이 강한 나라들이다.
한 국가가 절대빈곤을 벗어나는 데 있어 선택과 집중은 매우 효율적인 개발전략일 수 있다. 우리는 소수의 재벌이 글로벌 경쟁력을 갖추기까지 거시경제지표를 책임지며 성장을 견인해왔다. 그래서인지 오너 가계의 승계와 증여에도 우리 경제는 꽤나 너그러운 편이었다. 세무당국의 관점에선 일감 몰아주기나 유가증권 헐값 인수가 획기적인 아이디어로 보일지 모르겠다. 결과는 검증과 견제가 부족한 3세의 경영참여가 어느새 유행이 됐다. 모 항공사의 스캔들이 능력이 아닌 가정교육만의 문제라면 정말 다행이겠다.
이런 풍토에서 자란 대기업들은 요즘 길거리 상권까지 잠식한다고 비난을 듣는다. 중소기업의 기술력은 하나같이 갑을구조에 매몰된다. 전장에서 돌아온 가토 기요마사는 축조와 치수 등 인프라 구축에 힘썼다. 구마모토 현에서는 지금도 대단한 인물로 칭송한다. 민초들에게 두루 혜택을 주었기 때문이다.
소수의 성패에 의존하는 경제구조는 집중리스크가 크다. 위기에 취약하다. 이런 산업 포트폴리오는 제대로 고쳐나가지 않으면 국가든 일개 가문이든 나락을 피할 수 없다. 정부나 우리 사회가 대기업의 탐욕만 비난해선 풀릴 문제가 아니다.
이성규 유암코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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