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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낱말의습격]읽는 힘과 듣는 힘(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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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의 논리를 키운다며 웅변학원에 보내는 것이 유행이던 때가 있었다. 자신의 생각이나 느낌이나 주장을 조리있게 잘 표현하는 일은 참 중요하다. 더구나 우리 사회에선 이게 제대로 안되어서 가슴이 콱콱 막히는 기분을 느끼는 사람이 뜻밖에 많다. 아이들에게 말을 잘 하는 법을 가르치는 일은 그러나, 본말이 잘못 되어 있다. 먼저 배워야 하는 것은, 말을 잘 하는 것이 아니라, 말을 잘 들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상대의 말을 잘 듣고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소통의 원리를 깨닫게 된다. 잘 들을 줄 알아야, 개념을 세울 수 있으며 상대방의 귀를 붙잡는 방식을 알게 된다.

남의 말을 귀담아 들을 줄 모르고, 남의 말을 자주 오해하거나 곡해하고, 남의 말의 뉘앙스를 놓치거나 남의 말이 지닌 깊은 뜻을 이해하지 못할 때, 쏟아내는 말은 일방통행일 수 밖에 없다. 상대방의 말은 듣지 않고 내 말만 듣기를 강요하는 말하기가, 우리 사회에 쏟아내놓은 소음은 얼마나 많은가. 대화가 아니라 우기기와 강요와 멱살잡이가 기승을 부리는 까닭은, 듣는 능력이 치명적으로 부족하기 때문이다. 귀가 섬세해야 입이 섬세해지며, 귀가 밝아야 말 또한 밝아진다.
비슷한 논리로, 글을 잘 쓰는 일을 배우려고 하는 사람이 많다. 글을 잘 쓰기 전에 해야할 것은 글을 잘 읽는 것이다. 글을 하나하나 놓치지 않고 꼼꼼히 읽는 것만이 잘 읽는 것은 아니다. 언표로 표현된 것을 이해하는 것 뿐 아니라, 낱말의 다채로운 개념과 그 빛깔들, 행간의 말들, 맥락에서 흐르는 메시지, 표현들이 담지하고 있는 뉘앙스들, 상징들, 글의 배경과 다른 글과의 관련에서 생겨나는 의미, 집단정서나 역사적 의미가 잠복된 문장들, 필자의 상황과 호흡과 습관 등 고유한 글쓰기 캐릭터까지 읽어내는 것이 이른 바 독해이다.

남의 글을 제대로 독해할 수 있느냐, 많은 글 혹은 길거나 깊은 글을 읽어낼 수 있느냐는 문제는, 우리 사회에 점점 확산되고 있는 '디지털 문맹사회'의 징후를 드러내주기도 한다. 글자를 읽어낼 수 있다고 글을 읽어내는 것은 아니며, 책을 읽었다고 반드시 책을 해독해내거나 음미했다고 말할 수 없다. 글은 글자 이상이며, 책읽기는 책읽기 그 이상이다. 글을 제대로 읽지 못하는 채로, 글을 제대로 쓴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어느 학자는, 문명은 '해답'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질문'에 있었다고 얘기한다. 선진국과 후진국의 차이는, '질문하는 힘'에 달렸다고 말하기도 한다. 선진국은 인류의 문제의 변경에서 그 밖을 향해 질문하고 있는 나라이며, 후진국은 선진국이 질문을 통해 닦아놓은 대답의 길을 그대로 따라오고 있는 나라라는 것이다. 세상의 창의는 모두 질문이 뛰쳐나간 그곳에서 돋아난 것이며 그것이 문명의 궤적이며 인류역사의 길이었다.
'질문'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질문은 말하기이며 글쓰기이지만, 일방적인 말하기와 글쓰기가 아니다. 무엇인가를 듣고난 다음, 혹은 무엇인가를 읽은 다음, 발생하는 말하기와 글쓰기가 바로 질문이다. 질문하는 힘을 키우기 위해서는, 사고의 훈련이나 창의적 환경들도 중요하지만, 기본적으로는 듣고 읽는 힘이 있어야 한다.

듣는 것이 실력이며 잘 듣는 것이 능력이며 제대로 듣는 것이 내공이다. 읽는 것이 실력이며 잘 읽는 것이 능력이며 제대로 읽는 것이 내공이다. 평생 동안 당신이 내놓는 질문 중에서, 인류를 움직일 위대한 기폭제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 질문을 위하여, 듣고 읽는 힘을 키우는 일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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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국 편집에디터, 스토리연구소장 isomi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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