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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낱말의 습격]은혜도 모르는 인간(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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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공공 화장실에는 낙서가 거의 사라졌다. 내가 '거의'라고 하는 까닭은, 얼마 전 어느 역 화장실에서 긴급히 갈긴 낙서 하나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화장실의 낙서 욕망은 남이 보지 않는 곳에 혼자 있을 때 마음을 잘 다스려라는 옛사람들의 신독(愼獨)정신과, 인간의 냄새나는 본질 위에 이윽고 앉은 영혼의 곰곰한 반성이 서로 길항작용을 한 결과라고 나는 생각한다. 생각이 명료해지면서, 그리운 것들은 더욱 그리운 것들로, 분한 것들은 더욱 분한 것들로 갈피를 잡는다. 그 결과가 호주머니에서 꺼낸 볼펜 따위로 그려지는 구륵(鉤勒)의 서화이다.

은혜도 모르는 인간!
내가 본 광초(狂草)의 글씨는 이것이었다. 욕설도 없고 거친 말투도 보이지 않는 것으로 봐서, 이 밀폐된 공간에서도 공적인 시선과 도덕교과서의 억압에서 아주 벗어나지는 못한 사람 같아 보였다. 그렇지만 격렬하게 휘갈겨 쓴 그 글씨에는, 여기서나마 고발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분한 심정이 피처럼 흘러나와 있었다. 어떤 욕보다도 더 힘주어 말한 저 '인간'이라는 욕에는, 저런 호칭으로 불리운 어떤 대상에 대한 격한 미움과 실망과 환멸이 실려 있는 듯 했다. 꾹꾹 누르다 마음이 터져나왔지만 그는 더 이상 욕을 진행할 수 없었다.

생각해보면 그렇다. 그는 저 '인간'에게 좋은 일을 많이 했다고 자부했을 것이다. 저 인간이 구차해져 있을 때 도움도 많이 줬을 것이고, 저 인간이 슬플 때 격려도 했을 것이다. 저 인간에게 세상이 따뜻하고 삶이 의미있음을 일깨워 줬을 것이다. 그런데, 그 인간은 살 만해지마자 그의 뒤통수를 치고 그를 폄하했을 지 모른다.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느냐는 듯, 모든 게 자기의 노력과 능력의 결과라는 듯 은인을 업신여겼을 지도 모른다. 세상엔 그런 드라마들이 널려 있지 않은가. 어쩌면 그런 마음이란, 인간 별종이 지니는 특이한 심성이 아니라, 인간 모두가 공유하는 저마다의 약점을 통제하지 못한 결과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그는 분하고 서러웠으리라. 화장실에서 똥을 누며 앉아 그 분함과 서러움을 삭였으리라. 그러나 결코 똥으로 빠져나가지 않은 채 똬리를 튼 그 마음이, 마침내 볼펜을 들어 그 자를 고발하게 하였으리라. 저 느낌표를 찍는 마음을 생각한다. 저 기호 하나에 들어있는 경악과 모멸감과 그 뒤에 따라오는 번민과 불면을 생각한다. 저 낙서 하나가, 새삼 '독자'인 내게 감동을 주는 것은 '수식없는 마음'이 직핍하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아아, 돌아본다. 나 또한 어느 화장실 벽에, 저 느낌표 앞의 인간으로 찍혀 기소되어 있지 않은가 하고.

'낱말의 습격' 처음부터 다시보기

이상국 편집에디터, 스토리연구소장 isomi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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