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수관선생 댁에 갔다 올 때까지만 해도 송사장과 그의 패거리를 가리켜 사탄의 무리니 탐욕과 악의 화신이니 하며 절대로 물러서지 않겠다고, 그러면서 하림더러 자기를 도와달라고 했던 그녀였다. 그런 그녀가 이제 와서 이곳을 떠나겠다고 하니, 하림으로서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뜻밖의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꼭 운학 이장 때문만은 아니예요.” 그런 하림의 마음을 짐작한다는 듯이 그녀가 변명처럼 말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어요.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모두의 적이 되었고, 어느새 그 적들에게 포위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죠. 이 세상엔 탐욕을 이길 힘은 없어요. 송사장과 그의 무리들.... 그날 보셨잖아요? 그리고 꿀 먹은 벙어리처럼 바라볼 뿐인 마을 영감네들.... 평당 몇 만원도 하지 않았던 땅이 천정부지로 뛰어오르는 걸 보고 모두 미쳐버린 사람들.... 죄없는 개를 줄줄이 쏘아죽이고도 아무렇지도 않은 듯 살아가는 사람들....짐승처럼 변해가는 그들이 무서워졌어요.” 그리고나서 그녀는 한숨을 지으며 말했다.
“어쨌거나 더 이상 우리가 이곳에 있어야 할 이유가 없어졌어요. 아버지마저 저렇게 된 판국에....언제 나오실지도 모르겠고.....” 하림은 처음 그녀랑 마주쳤던 이른 봄날을 기억했다. 저수지 옆 산책길이었다. 까만 자켓을 걸치고 나풀거리는 긴 까만 치마를 입고, 까만 선글라스까지 하고 있었던 그녀는 온통 까만색으로만 보였었다. 왠지 모르게 신경질적이고, 도도한 느낌까지 주던 인상이었다. 그런 그녀가 지치고 피곤한 모습으로 지금 자기 앞에 앉아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남경희에게도 말했듯 지나면 지날수록 하림은 세련되지 못해 보이는 그의 내면 빛나는 너무나 순수함 같은 것이 느껴졌다. 때때로 거칠게 보이기도 했지만, 이 너무나 계산적인 세상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순수함이었고, 열정이었다. 그날 바람 불던 밤, 그들 뒤를 몰래 따라와 상처받은 짐승처럼 소리치던 모습도 떠올렸다. 그때는 몰랐지만 하림은 어쩌면 그가 자기조차 까맣게 잊고 살았던 그런 열정 같은 걸 품고 살고 있는 사람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열정이라면 지친 남경희를 얼마든지 품어 줄 수 있을 것이었다.
글. 김영현 / 그림. 박건웅
김영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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