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상으로의 길은 녹록지 않았다. 현종 즉위 이후 재상 자리는 요숭, 송경, 장열, 장구령 등 문학적 재능을 갖춘 관리에게 주어졌다. 현종이 그를 재상에 발탁하려하자 장구령은 "무릇 재상은 국가의 안위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다. 그가 재상이 되면 장차 나라에 재앙이 닥칠 것"이라며 반대하였다. 장구령은 황제에 대해 간언하는 것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는 강직한 신하였다. 그러나 끊임없이 충고하려 드는 장구령에게 넌더리가 난 현종은 이임보를 재상으로 발탁했다. 그는 궁정의 후궁, 환관 등을 회유하여 황제의 일거수일투족을 샅샅이 염탐하였고 끊임없이 충성심을 연출하였다. 장구령은 이임보에게 보낸 귀연(歸燕)이라는 시에서 "같이 벼슬길에 올라 정사를 나누기 얼마이던가. 세상사 다툴 마음 없으니 솔개와 매처럼 서로 물어뜯지 마세"라며 패배를 인정하였다.
이민족 출신을 당나라 변경을 지키는 절도사에 발탁한 것이야말로 최대의 실정이었다. 절도사는 전통적으로 고위 한족 관료가 담당하였고 재상으로 발탁되는 핵심 요직이었다. 정적이 부상하는 것을 막기 위해 비한족 출신 무장을 절도사에 발탁한 것이 안사의 난을 초래한 중대 원인이 되었다. 가서한, 안녹산, 고선지 등이 절도사가 될 수 있었던 것도 이임보 덕분이었다. 안사의 난 이후 절도사 권력을 어떻게 통제하느냐가 당 황실의 최대 우환거리가 되었다.
그의 말년은 새로운 실력자로 부상한 양국충과 안녹산과의 힘겨운 권력투쟁으로 점철되었다. 양국충은 양귀비의 먼 친척으로 양귀비 언니 괵국부인의 정부가 되어 권력에 진입하였다. 그는 이재에 밝은 탁월한 재무관료로 군비팽창과 궁정사치로 어려움에 처한 당 재정을 재건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정부 창고의 충실함이 고금에 비결될만한 것이 없다"고 할 정도로 뛰어난 관리능력을 보여주었다. 풍채 좋고 행동거지가 호탕하여 황제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그의 권력이 약해지자 여러 가지 죄상을 들어 규탄하는 자가 나타났다. 신변에 위협을 느껴 100여명의 경호원을 늘 대동하였고 집에서조차 어느 곳에 거처하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보안에 신경을 썼다. 751년 병상에 눕자 문병 온 양국충에게 가족의 안위를 부탁하고 세상을 떠났다. 염량세태를 반영하는 듯 그의 사후 관작은 삭탈되고 재산은 몰수됐으며 자손은 유배되었다.
박종구 한국폴리텍대학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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