캄캄한 둑길에 바람조차 불고 있어 괴기스럽게 느껴졌다.
그래도 여자를 앞에 가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하림은 할 수 없이 걸음을 빨리 해 자기가 앞장을 섰다. 어둠 속에서 저수지의 표면이 검은 유리창처럼 나타났다.
바람이 머리카락을 아무렇게나 흩어놓고 잠바 안으로 파고들어 풍선처럼 부풀어 올렸다. 아직 채 물이 오르지 않은 마른가지와 풀들이 회초리를 휘두르듯이 윙윙 소리를 내어 불었다. 어두운 둑길 위로 불어오는 바람소리에 하림은 에밀리 부론테의 <폭풍의 언덕>에 나오는 황량한 들판이 떠올랐다. 어딘선가 히스클리프, 히스클리프, 하고 부르는 캐서린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 했다.
혜경을 생각하니 갑자기 잊고 있었던 그리움 같은 게 느껴졌다.
“혜경아....”
하림은 속으로 자그맣게 불러보았다. 그러나 곧 혜경의 얼굴 위에 또 다른 얼굴 하나가 겹쳤다. 하소연이였다. 그녀 역시 조금씩 그리움으로 변해가려고 했다. 가까이 있어도 그리운 것은 사랑이다. 그리고 그런 사랑은 결코 나뉘어질 수 없는 것이다. <폭풍의 언덕>은 바로 그 나뉘어질 수 없는 지독한 사랑에 관한 이야기였다.
“폭풍의 언덕 보셨나요?”
하림이 그녀가 따라오는 걸 확인이라도 하는 양 고개를 젖히고 물었다.
“오래 전에 영화는 봤는데.... 소설은 못 봤어요.”
그녀가 크게 말했다. 바람이 그녀의 말끝을 잘라먹었다.
“바람이 부니까, 그 소설이 떠오르네요. 지금 저수지 둑길의 풍경이 마치 그 영화나 소설에 나오는 한 장면 같아서요. 캐서린과 히스클리프의.....”
하림이 다시 고개를 뒤로 젖히고 어둠을 향해 말했다.
“지독한 사랑. 그게 무서운 복수를 낳죠. 소설 속엔 이런 말이 나오죠. 우리 둘 다 죽는 날까지 널 붙잡아 두고 싶어! 네가 괴롭든 말든 난 상관없어. 네가 괴로운 건 상관 안 해. 왜 너는 괴로우면 안 되나? 나는 괴로운데.... 너는 날 잊을거니? 내가 땅에 묻혔는데, 너는 행복할거니? 남자 주인공 히스클리프가 캐서린에게 하는 말이죠. 정말 지독하죠?”
하림은 그녀가 듣건 말건 앞을 보고 말했다. 어차피 반은 바람소리가 짤라먹을 것이었다.
“너무 이기적이네요. 난 그런 사랑, 해본 적도 없고 하고 싶은 마음도 없지만.... 사랑이란 것도 일종의 병이 아닌가 싶기도 해요. 죄악의 근원이기도 하구요.”
그녀가 등 뒤에서 마치 신앙 고백이라도 하듯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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