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정종오 기자]봄은 갔다. 여름은 벌써 와 버렸다. 때 이른 불볕더위에 산으로, 바다로 달려가는 이들이 많다.
지난 6일 오전 6시 현충일. 계룡산을 찾았다. 동학사에서 남매탑까지 올랐다. 1시간 30분 남짓 올라가는 길은 외롭지 않았다. 더위에 지친, 혹은 일찍 잠을 깬 이들이 하나, 둘 앞서가거나 혹은 뒤따라오고 있었다. 낯선 이들이지만 산에서 만나면 반갑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서로 힘을 실어주면서 남매탑까지 오르는 길은 시원한 산바람이 알맞게 불고 있었다.
50대 중반의 아주머니들이 막 도착한 우리 일행을 두고 "혹시 커피 있어요?"라고 물어온다. 커피믹스는 있는데 뜨거운 물이 없단다. 남매탑에서 마시는 커피는 어떤 맛일까. 궁금해진다. 커피가 없다는 사실을 듣고는 한 아주머니가 남매탑을 지나 산사로 향한다. 혹 그곳에서 뜨거운 물을 얻을 수 있겠거니 생각했을까. 커피에 대한 집념이 강하다.
남매탑을 지나 관음봉으로 오를까 생각하다가 내친 김에 갑사까지 가 보기로 한다. 산은 묘하다. 숨이 턱턱 막혀 더 이상 가지 못할 것 같은 절박한 상황에서도 정상에 오르면 다리가 저절로 걸음을 재촉한다. 자동이다. 남매탑에서 갑사로 가는 길은 내리막길이다. 이정표는 약 3㎞ 정도라고 알려준다. 내리막길이니 1시가30분이면 족하리라.
내려가는 우리를 보고 오르는 사람들이 "벌써 내려오세요?"라고 감탄의 인사말을 건넨다. 8시를 조금 넘긴 시간이다 보니 정상에 올랐다가 벌써 내려오는 시간치고는 이른 감이 없지 않다. 갑사에 도착하기 전 용문폭포를 만났다. 산 위에서 내리쬐는 햇살과 물살이 어우러지면서 무지갯빛을 내뿜는다. 이어 조그마한 암자인 대성암이 나타난다. 대성암은 갑사의 말사로 임진왜란 때 승병을 이끌고 순절한 영규대사의 넋을 기리고 있는 곳이다.
대성암 오른쪽으로 있는 표지석이 눈길을 끈다. '부처님 모실 곳'. 부처님의 사리를 '모신 곳'이 아닌 앞으로 모실 곳이란 표지석에 웃음이 머문다. 마침 텃밭을 일구던 한 비구니 승이 손을 합장하며 우리를 반갑게 맞아준다. 짧은 인사와 웃음을 머금고 갑사로 향한다.
갑사에 도착했을 때 가장 먼저 맑은 약수가 우리를 기다린다. 약수는 시원하지 않았지만 거북의 입에서 뿜어져 나오는 물은 갈증을 녹여주기에는 넉넉함이 있었다. 마땅한 지팡이를 가져오지 못한 채 산에서 주은 이른바 '산신령 지팡이(아무렇게나 버려져 있는 막대기를 그냥 집어 지팡이로 사용하는 것)'을 옆에 놓고 갑사의 물을 맛있게 먹었다.
50대 중반으로 보이는 한 아주머니가 가만히 다가오더니 살짝 웃으며 "그 지팡이 버리실 거예요?"라고 묻는다. 산행을 마치고 내려가는 길이니 쓸모가 다하지 않았겠느냐는 지레짐작이었다. 자신이 산을 올라야 하는데 지팡이가 필요하다는 표정이었다. "다시 연천봉으로 오르려고 하는데요. 아직 이 지팡이는 버리기에는 여의치가 않습니다."라고 답했다. 아주머니는 아쉽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는 물러났다.
갑사는 420년 백제시대에 창건한 오래된 고찰이다. 이후 통일신라시대 의상대사가 화엄대학지소를 창건해 화엄도량의 법맥으로 전국의 화엄10대 사찰의 하나가 됐다. 계룡갑사로도 불린다.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오래된 세월만큼 곳곳에 갑사의 향기가 묻어났다.
◆올랐다 내려갔다 다시 오르다=동학사에서 남매탑으로 다시 갑사로. 오전 6시부터 시작된 산행은 갑사에 도착했을 때 10시30분이 됐다. 이쯤되면 웬만한 산행이겠는데 다시 다리가 저절로 산을 향해 움직인다. 연천봉으로 가자한다. 갑사에서 연천봉까지는 약 2.7㎞. 그래 내친김에 '산신령 지팡이'도 양보하지 않았겠다, 올라야겠다고 생각한다.
처음 30분은 능선을 오르듯 가뿐한 발걸음이었다. 그러나 잠시 뒤 경사도가 가파른 오르막길이 앞에 버티고 섰다. 말 그대로 죽을 맛이다. 이제 고등학교 때 한 은사가 던져준 주옥같은 명언(?)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그 은사는 고등학생인 우리에게 이렇게 말했었다.
은사는 "왜 산을 오르지 못하느냐? 왜 달리기를 하지 못하느냐?"고 나무란 뒤 "산을 오르거나 달리기를 할 때 잘할 수 있는 방법은 딱 한가지이다. 오른쪽 발을 땅에 디딤과 동시에 곧바로 왼쪽 발을 옮겨라. 그렇게 반복적으로 하다보면 정상이든 결승선이든 너끈히 도착해 있을 것이다"라고.
지금 생각해도 대단한 명언이다. 한쪽 발이 땅에 닿기 동시에 곧바로 다른 발을 옮기고 또 순서대로 내딛고. 두발이 교차적으로 내딛는 그 순간을 눈으로 보기만 하면 된다. 무상무념의 세계로 빠져드는 것일까. 아무 생각이 없다. 오른발과 왼발의 움직임만 눈에 들어온다. 그렇게 1시간 남짓 '내가 아닌 나'가 산을 오르다 보니 어느새 연천봉 정상에 서 있었다.
연천봉 정상 쉼터에서도 땀을 식히는 사람들이 많다. 더위를 피해 산으로 온 이들의 달콤한 휴식이다. 그중에는 미국의 보스턴에서 왔다는 20대 초반의 여학생도 보이고 이곳 계룡산에서 수행하고 있다는 중국 출신의 남자스님도 보인다. 둘은 주변의 다른 사람들과 냉막걸리잔을 한 잔 마시며 남매탑에 얽힌 전설을 이야기하고 있다. 서로 어울려 계룡산에 대한 이야기와 불어오는 산바람을 주제로 '더위를 잊은' 즐거운 대화를 나누고 있다.
연천봉에서 관음봉을 통해 다시 동학사로 내려가는 길. 이제 정말 끝이다. 오전 6시부터 시작된 산행은 오후 2시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은선(隱仙)폭포를 지나 관음봉으로 올라오는 이들의 줄이 끊이지 않는다. '올랐다 내렸다 올랐다' 다시 나는 내려가는 길. 은선폭포를 지나 관음봉까지 오르는 약 900m는 그야말로 가파른 등산로의 전형을 보여준다. 힘들다. 한쪽 발이 닿고 곧바로 다른 발을 내딛는다는 게 이론처럼 쉽지 않다.
내려오는 우리들에게 올라오는 사람들의 "얼마나 가면 되요?" "몇 미터 남았어요?"라는 질문이 헉헉거리는 숨소리와 함께 이어진다. 그때마다 "얼마 안 남았어요. 힘내세요. 오른발과 왼발을 서로 교차하며 가다보면 금방이에요."라고 답한다. "정말이에요?"라고 되묻는 질문에는 산바람이 스쳐 지나듯 시원한 웃음으로 답하고 만다.
이른 다위가 부른 계룡산에는 서로를 위로하고 서로를 보듬는 소리로 가득했다.
세종=정종오 기자 ikok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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