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중학교 때 단짝을 우여곡절 끝에 만났는데 우리는 척 보자마자 40년간 봉인된 추억이 스멀스멀 기어 나와 현재화되는 걸 만끽했다. 강남 뒷골목에 있는 조그만 횟집에서 조우했는데, 50대 중반의 얼굴에서 (어렴풋하긴 했지만) 사춘기 까까머리 소년의 짓궂은 표정과 설익은 고뇌를 다시 본 것이다. 그때 그 시절이 반갑기도 하고 서글프기도 했는데 이 역시 추억의 장난이다. 더 신기한 건 술잔을 나누다 엉기적거리며 화장실로 들어가는 그의 뒤 표정에도 과거의 잔상이 찐득하게 묻어 있었다는 것이다.
"그나저나 그때 너는 왜 갑자기 사라졌던 거지? 어느 날 보니까 네가 안 보여서 내내 궁금했거든…."
"나 2학년 가을에 시골로 전학 갔잖아. 반장이었던 네가 급우들에게 거둔 돈으로 샀다며 '죄와 벌' 그리고 '데미안'을 소포로 보냈는데 생각 안 나? 편지까지 넣어서…."
그래, 우리는 타인의 절절한 순간을 기억에 담아 두지 못한 채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다. 가족은 물론 때론 나 자신의 슬픔이나 기쁨, 아픔도 다 기억하지 않는(또는 못하는) 것이다. 행인지 불행인지 모르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절실한 기억 몇 컷만 더 또렷해지는 것이다. 시간에 풍화되지 못하고 늘 맨 앞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글=치우(恥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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