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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승들의 사생활 - 5장 저수지에서 만난 여인 (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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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승들의 사생활 - 5장 저수지에서 만난 여인 (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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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림이 그쯤에서,
“하여간 그건 그렇고, 건강하세요. 할머니. 너무 상심하시지 마시고.... 재영씨가 이곳으로 가면 저더러 자기 고모님을 꼭 한번 찾아봬 달라고 당부를 하더군요. 고모님이 죽은 개 때문에 많이 마음 상해하시고 계실 거라면서....”
하고 별 내용도 없는 말을 마무리 삼아 달았다.
“상심이고 말고 할 것이 있남유? 그래, 언제까지 있을거유?”

하림의 말에 고모할머니가 그제야 제 정신으로 돌아온 듯 다시한번 살펴보듯이 하림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물에 빠진 놈 제 보따리 찾듯 다시 처음의 의심과 경계심을 회복한 눈치였다. 하림은 괜히 기분이 나빠졌다.
그래서 약간 퉁명스러운 어조로,
“예. 전 당분간 여기 머물 생각이예요. 글도 쓰고....”
하고 말했다.
그러자 윤여사 고모할머니는 부쩍 의심스런 눈빛으로,
“물론 재영이 허락을 받아 왔겠지. 재영이 남편 허서방이 뭐라 하덜 않던감유?”
하고 떠보듯이 물었다.
“예. 전 사실.... 윤여사, 아니 윤재영 씨랑 그리 가까운 사이는 아니예요. 허서방인지 뭔지, 그 사람 남편이랑은 만난 적도 없구요.”
“그래유....?”
순간 고모할머니의 눈빛이 노인네답지 않게 날카로워졌다. 결코 자기는 누구의 말도 믿지 않는다는 투의, 각박한 세월을 살아온 사람 특유의 눈빛이었다. 그녀는 잠시 혼자 무언가를 생각하는 눈치더니 이내 말했다.
“암튼 잘 지내유. 겨울도 지나서 이제 좀 지내기가 괜찮을거유.”
그래도 끝은 역시 노인네다운 염려와 걱정을 담은 목소리였다.
그렇게 자기 나름대로 대충 마무리를 지은 다음 그녀는 의자 등받이에 기대놓았던 지팡이를 집어들더니, 앉을 때처럼 끙, 하고 용을 쓰면서 일어났다.

“가시게요?”
“응. 가야쥬. 너무 오래 있었어.”
“뭐라도 입맛 좀 다시고 가셔얄텐데....”
하림이 공연히 체면치레로 말했다. 사실 내놓을 거라고는 일회용 봉지커피 밖에는 없었다.
“됐어유. 담엔 우리 집으로 와유. 우리 집 어디에 있는지는 알쥬?”
할머니는 그래놓고 지팡이로 포도밭 너머를 가리키며,
“저쪽으로 쭉 내려가면 다리 건너 집 한 채가 나와. 예전에 물레방앗간 있던 자리요. 금방 찾을 수 있을거요.”
하고 말했다. 예전에 머슴이랑 야반도주 했다가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 동네 안으로는 들어오지 못하고 다리 너머에 집을 짓고 살았다는 이야기를 윤여사에게 들은 것 같았다.

“예. 그럴게요. 조만간 들르겠습니다.”
하림은 수돗가 마당 입구까지 따라 나가며 말했다. 울타리가 없으니 따로 문이 없었다. 마당 너머가 길이었고, 길 너머가 운학이 일하던 포도밭이었다. 고모할머니는 지팡이를 끌며 포도밭 옆으로 난 길을 따라 등을 보이며 천천히 사라졌다.
고모할머니가 가고나자 하림은 잠시 멍한 상태로 뒷짐을 진 채 마당을 혼자 서성거렸다.
그리고보면 이 조용한 시골에서 아침부터 지금까지 모두 다섯 명의 낯선 사람들과 만난 셈이었다. 아침 일찍 물 뜨러 갔다가 하소연이 수퍼에서 풍맞은 늙은 그녀의 사촌언니를 보고, 다시 수도 고치는 사내와 이장 운학이 다녀가고 나자, 산책길에 저수지에서 검은색 차림의 이층집 딸로 보이는 여자와 마주치고, 이어 윤여사 고모할머니가 왔다갔다.
글. 김영현 / 그림. 박건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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