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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승들의 사생활-4장 낯선 사람들 (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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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승들의 사생활-4장 낯선 사람들 (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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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아침, 하림은 일찍 눈을 떴다. 사방은 아직 어두컴컴하였지만 창문엔 깊고 푸른 물빛 새벽 여명이 소리 없이 몰려와 목을 빼고 안을 기웃거리고 있었다. 비라도 내렸나, 처마에서 가늘게 물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 밖에는 너무나 조용하였다. 너무나 조용하여 자기의 왼쪽 가슴 아래에서 뛰는 심장 박동소리와 숨소리마저 다 들릴 것 같았다.

‘여기가 어딘가?’
하림은 잠시 방향을 잃은 개미처럼 더듬이를 돌려보다가 곧 이곳이 윤여사의 화실이라는 것과 자기가 어제 이곳으로 와서 잤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나 하림은 곧바로 일어나지 않고 한동안 꼼짝 않고 누워서 어두운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얼마나 오랜만에 맛보는 달콤한 정적인가. 정적이 주는 달콤함을 즐기듯이 하림은 생각에 잠겼다.
깊은 정적은 느리고 긴 주파수를 가진 것처럼 천천히 흘러가고 있었다. 느리고 긴 주파수가 흐르는 공간에 빠르고 짧은 주파수의 자기가 들어온 것이었다. 이제부터 이 느리고 긴 주파수에 몸과 마음을 맞추어야 한다. 이해하는 마음이란 결국 서로 주파수를 맞추는 것과 다름없을 지도 모른다. 백련암 성철 스님이 자기를 뵈러 오는 사람에게 먼저 아래 절에서 천배의 절을 하고 오라고 시킨 것도 그이가 거만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주파수를 맞춰서 오라는 뜻이었을 것이다. 일단 주파수가 맞으면 말이 그리 필요가 없을 것이다. ‘열심히 살아!’ 그 한마디면 문득 스스로 깨달아지지 않았겠는가. 그러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천천히, 천천히,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말도 천천히, 걸음도 천천히, 동작도 천천히, 생각도 천천히..... 천천히 속에 건강도 있고, 행복도 있을 것이다.

‘자본주의는 질주다!’
라는 어느 시인의 말이 떠올랐다. 달리고, 달리고, 달리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자본주의적 질주의 생존방식이다. 그래서 한국인의 '빨리, 빨리'가 이 질주하는 자본주의 정신에 가장 잘 맞는 사고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한국인이 이 지옥 같은 세계화의 질주 속에서 이나마 살아남은 것인지도 모른다. 느린 놈들은 다 탈락이다. 아프리카의 느려터진 종족들도, 지중해가 느려터진 로마인이나 희랍인들도 모두 탈락이다. 때로는 음속보다, 대로는 빛보다 더 빠르게 질주하지 않으면 안 된다. ‘달리고, 달리고, 달리겠습니다!’ 어느 통신사의 광고 문구처럼 너나 없이 달려야 한다. 얼마나 산뜻한 자본주의식 광고인가. ‘거울 나라의 엘리스’에 등장하는 붉은 여왕은 쉼없이 달리지만 주변의 모든 것이 함께 달리고 있기 때문에 늘 제자리이다. 엘리스가 함께 달리느라 숨이 턱에 차올라, “우리나라에선 이렇게 한참동안 달리면 어딘가 다른 곳에 도착하게 되거든요.” 하지 붉은 여왕이 말한다.

“게으름뱅이 같으니라구! 여기선 같은 자리를 지키려고 해도 계속 달릴 수밖에 없어. 다른 곳에 가고 싶다면 최소한 두 배는 더 빨리 달려야 한다구!”
하지만 푸른 물기처럼 젖어오는 새벽의 창문과 깊은 정적 속에는 그런 질주가 더 이상 존재할 필요가 없었다. 여기는 붉은 여왕의 나라와는 정반대로 모든 것이 멈추어 서있기 때문에 달리는 놈이 오히려 이상할 것이었다. 천천히와 게으름이 때로는 미덕이 되는 법이다.
그런 쓸모없는 생각을 하며 누워있던 하림은 이윽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싱크대로 가서 물을 틀었다. 어제 하소연이 갖다 준 토란국이 있으니 아침밥만 앉혀놓으면 되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글. 김영현 / 그림. 박건웅



오진희 기자 vale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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