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박충훈 기자] 서울 을지로3가역에서 내려 종로방향으로 200m를 걸어가면 대림상가 건물이 나온다. 이 12층짜리 건물은 건축가 김수근의 작품으로 1968년 국내 최초의 주상복합건물로 완성됐다. 지난 40여년간 세운상가, 삼풍 등 인근 7개 상가와 함께 한국 첨단산업의 메카로 자리하던 곳이다.
대림상가는 오세훈 시장 때 철거 예정이었으나 보상 문제 등으로 무산된 후 지난해 4월 영업 재개를 공식 선언했다. 지난 1년간 상인회는 화장실을 보수하고 간판을 교체하는 등 영업 정상화를 위해 갖은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장사가 시원치 않다. 영업 재개 후 1년이 지난 이곳을 최근 다시 찾았다. 건물 외벽에 낀 새까만 때와 건물 입구에 걸린 '도청기, 위치추적기, 비아그라, 도박장비'를 판다는 입간판만이 상가의 현실을 말해주고 있었다.
상인들은 "가게문을 열었어도 실업자나 마찬가지"라고 입을 모은다. 청계천 일대 상가는 오세훈 전 서울시장 재임 시절 야심차게 추진했던 재건 계획이 무산되거나 답보상태다. 이들 상가의 현실을 대림상가는 온몸으로 보여주는 듯 했다. 한 상인은 "서울시가 정책 실패로 인해 상인들에게 영업 피해를 입혔으면 어떻게든 다시 손님을 모아줄 생각을 왜 안하느냐"고 분개했다.
대림상가 상인회장을 맡고 있는 한상열 씨(73)는 46년째 부품사업을 하고 있는 상가 '통'이다. 청년시절부터 세운상가 일대에서 일했다. 지금도 오락기 등에 들어가는 스피커 부품 유통업을 하는 한씨는 "20~30년 전에는 이곳에서 떼돈을 벌어 빌딩을 산 사람도 있다"고 말했다. 그는 "지금은 10년전 매출의 반토막이 됐다. 예전 매출의 50~60% 정도"라며 "상인들이 거의 실업자 수준"이라고 분통을 터뜨렸다.
한씨는 "정책을 실패했으면 홍보든 관리비 지급이든 다시 상권을 살릴 대책을 세워야 할 것 아니냐"며 지자체와 정부를 비판했다. 상인회에 따르면 상가 전체에 359개 상점이 있고 그중에 오락기 취급하던 곳이 10년 전 만해도 114개 정도였는데 현재 가게수가 절반으로 줄었다. 한씨는 "아침 겸 점심을 먹거나 끼니를 거르는 사람들도 있다"고 말했다. 이같이 대림상가가 불황을 면치 못하는 것은 오락실이 온라인게임에 손님을 뺐기며 사양산업이 된 이유도 있다. 하지만 결정적인 이유는 지난 2006년에 터진 '바다이야기' 사태였다. 그와 유사한 사행성 오락기가 집중 단속을 받자 대림상가 오락기 코너의 매출도 직격탄을 맞았다.
◆ "대림상가가 부품산업 멘토돼야"
사실 대림상가는 노래반주기, 오락기 등에 특화된 곳이다. 그중 2층 오락기 코너는 국내 아케이드 오락기의 산실이었다. 지금도 이곳은 당산동에 있는 영등포 유통 전자 상가와 함께 전자 오락기 산업의 양대산맥을 형성하고 있다. 사행성 게임기, 일본산 오락기판 불법 복제 등 음지의 역사도 많았지만 국내 전자산업의 부흥기에 한몫을 담당했다.
80~90년대 오락실 산업이 흥할 때 이곳은 '내가 제일 잘 나가'하던 곳이었다. 동네 청소년 오락실에 아이들이 북적였고 대림상가 오락기들은 전국에서 몰려온 상인들에 의해 팔려나갔다. 전자업계의 씨앗역할도 담당했다. 이 곳에서 40년째 장사를 한다는 삼화정밀 관계자는 "금성(현 LG), 삼성 등에서 만드는 전자제품의 부품도 이곳에서 납품됐다"고 말했다.
상가 안 1평 남짓한 선술집에서 만난 60대의 전자부품 가공업자는 "30년전부터 오락기 부품을 만들었는데 장사가 참 잘 됐다"고 말했다. 그는 다방에 들어가는 좌탁형 파친코 오락기에서 동전이 쏟아져 나오는 부분에 사용되는 부품을 만들었다. 일본에서 수입한 동전 계수기 부품을 본따 가공했었다. 당시 다방 등에 전자오락기를 설치하면 월 임대료를 메꿀 수 있을 정도의 짭짤한 돈벌이가 됐다. 자연히 대림상가에는 전국에서 모여든 오락실 업자들로 인해 발디딜 틈이 없었다고 한다.
상인회장 한씨는 "게임기 시장이 부품산업 등 일자리 창출 뿐 아니라 오랜시간 경력이 쌓인 숙련공을 다시 불러낼 수 있는 기회"라고 말했다. 그는 "지금도 이란, 인도 등지에서 온 바이어들이 중고 전자 오락기를 많이 사간다"며 "대림상가에게 부품산업의 멘토 역할을 맡기는 등 이곳의 노하우를 살려 수출산업을 연계·육성하는 정책이 세워져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박충훈 기자 parkjov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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