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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농시인 홍일선의 '느린 삶' 그리고 '흙의 경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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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이규성 기자] 오후 세시 무렵 남한경변 중군이봉 아래는 닭소리로 요란하다. 날이 추워 일찍 계사로 돌아온 닭들이 이른 저녁밥을 먹는 참이다.

'흙의 시인' 홍일선(64)은 늘그막에 '닭 아버지'가 됐다. 경기 여주군 점동면 도리 '녹색체험마을' 내 '바보숲 명상농원'. 궁벽한 도시에서 귀농한 지 7년째, 그가 선택한 삶은 '자발적 가난'이다. 시대의 상처를 어루만지는 시인에서 농부로 이어지는 인생 2막의 주제는 '흙으로의 귀환'이다. 그의 농법은 결코 자연을 거스르지 않는다. 현재 농장에는 닭 600마리가 있다. 그는 닭을 '닭님'이라고 부른다. 닭님이 된 연유는 이렇다.
"이곳에 와서 얼마 안 있어 강변이 파헤쳐지고 거대한 삽질이 진행됐다. 생전 처음 그렇게 큰 덤프 트럭과 포크레인이 있다는 걸 알았다. 하루 열여덟 시간 강변 공사판 소음으로 잠조차 들 수 없었다. 그래서 한동안 문막이며 치악산, 장호원 등지로 도망 다녔다. 닭들도 사라져 갔다. 주인이 닭을 버렸으니 오죽 하겠는가 ? 소음 공해에 알조차 낳지 못 하고, 족제비에 잡혀 먹고, 어떤 닭들은 그저 시름 없이 쓰러졌다.

떠날 생각마저 했다. 내가 스스로를 버리고 생명을 외면했을 즈음 사라졌던 닭들이 노란 병아리를 이끌고 돌아왔다. 사라진 줄 알고 나는 이곳을 버렸는데...어느 숲에선가 스스로의 생명을 지키고 낳고 기르면서 고통을 이겨낸 닭들에게 부끄럽고 눈물 났다. 그리고 경이로운 생명에 머리가 숙여졌다. 비로소 떠나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결코 생명은 버릴 수도 없고 버려서도 안 되는 것이었다. 그렇게 닭이 나를 구원해줬다."

이후로 홍시인은 닭을 '닭님'이라고 부르며 귀히 대한다. 닭들이 사는 공간은 숲 전체다. 낮동안 중군이봉 곳곳에서 지내다 오후에 돌아온다. 농장에는 계사가 있기는 하지만 닭을 가두는 공간은 아니다. 풀어서 키우면서도 숲 어디에도 철조망조차 두르지 않았다. 닭들은 너른 숲을 맘껏 돌아다니며 알도 낳고, 그저 자연스럽게 살아간다. 홍시인도 닭들과 함께 숲을 노니는게 일과 중 하나다. 주로 알을 찾으며 명상하는 시간이다. 홍시인은 알을 찾을 때마다 '닭님, 고맙습니다'하고 인사를 잊지 않는다.
대신 가져온 만큼 준다. 홍시인이 개발한 배합사료다. 일종의 특식인 셈이다. 특식에는 황토, 부엽토, 깻묵, 쌀겨, 옥수수 등 13가지 재료가 들어 있다. 그래서인지 닭들은 약을 먹지도 않고 조류 독감(AI) 등 각종 병해를 잘 이긴다. 시인은 "참 희안하게도 닭들은 나무 가지에 앉기만 하면 모두 강을 바라보고 있다"며 "승려가 면벽수도를 하듯이 닭도 면강ㆍ면수를 통해 참선하고 명상한다"고 말한다. 시인은 또 "동학에서 사람안에 한울이 담겼다고 한 것처럼 닭에게도 한울이 담겨 있다"고 설파한다.

홍시인에겐 '닭님' 외에 흙, 숲, 강, 햇볕, 곡식 등 '5덕님'이 있다. 생명을 북돋우는 것들이다. 농장 이름답게 이곳에선 닭도 명상하고 모든 것이 생명으로 귀결된다.

닭이 사는 계사 또한 생명이 '순환'하는 공간이다. 일년 내내 별도의 청소를 하지 않고 설령 똥이 쌓여도 자연으로 돌아가는 형태다. 실제로 계사는 전혀 냄새가 나지 않을 정도로 쾌적하다.

'그렇다면 닭 600마리로 생계는 가능할까 ? ' 홍시인은 "넘치지는 않지만 충분하다. 돈을 적게 들이며 생활을 꾸린다"고 말한다. 계란은 한개에 1000원에 판다. 닭은 귀농을 희망하거나 생명을 귀히 여기는 사람에게만 분양한다. 그가 충분하다고 하는 정도는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수준에는 턱없이 못 미친다. 도시 한편에서 삶의 확장에 여념 없는 이들이 계란 몇 개로 삶을 영위하는 일이 실감 날리 만무하다.

그가 닭을 키우게 된데는 아동문학가 이상권씨와의 특별한 인연에서 비롯됐다. 2008년 조류독감으로 살처분 위기에 처한 닭 다섯마리를 이씨가 빼돌려온 것이다. 우리나라 고유의 토종이다. 전국에서도 토종을 키우는 양계장은 드물다. 홍시인의 농원은 그 중 하나다. 김홍도의 민화속에나 나올법하게 생긴 수탉들은 울긋불긋하다. 노랗고, 붉고, 흰 깃털들이 유난스레 반짝인다. 다가가면 서슬 퍼렇게 달겨들 듯 힘 차다.

홍시인은 더 이상 늘릴 생각은 없다. 애초에 욕심이 없는 탓이다. 적게 생산하고 적게 소비하고, 자연과 더불어 자립하는 삶의 방식은 어느 덧 그가 머무를 여생의 거처가 됐다. 그는 느리고, 가난하고 생명을 받드는 삶을 추구한다. 그 삶의 꾸림은 벗들에 대한 기다림으로 이어진다. 자연과 생명의 근원에 이르러 "텅빈 충만으로 스스로를 채워", "희망의 씨앗을 품는"(야산) 일임을 실천하기 위해서다.

그 기다림은 이제 그의 독특한 자연 농법을 대하는 사람들에게 깊은 감화를 주고 있다. 심지어는 지난해 농촌진흥청으로부터 '강소농 100인'에 선정돼 이미 공인(?)된 상태다. 그의 농법을 배우러 찾아오는 이들도 많아졌다. 홍시인은 이들을 마다하지 않고, 오히려 나누느라 여념이 없다. 홍시인은 기꺼이 '바보숲 느림보 강 등불학교'를 열었다. 마당 한편엔 작은 황토방을 지어 사람들이 쉴 공간을 마련했다. 가을역에 작은 '명상 축제'도 연다. 학교와 축제는 누가 누구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배우고 익히는 곳이다.

지금 그에게 오는 사람은 모두 세상에서 피 흘리고 지친 상처투성이의 벗들이다. 그래서 "아프게 맞아야만 생의 중심을 채울 수 있어서 빙판의 경계를 지키는 팽이처럼" 살아왔던 이들을 위해 시인은 다시 노래한다.

 "강물이 꽁꽁 얼었구나.
 그래도 손을 넣으면 물의 몸은 따숩구나.
 언 강이 풀리는 꽃 피는 봄에
 사람이 돌아왔으면 좋겠구나."
 - 시집 '흙의 경전', 슬픈 북소리 2, '공무도하가' 중에서-

한편 홍시인은 80년 '창작과 비평'으로 등단, 민족문학작가회의 사무국장과 한국작가회의 이사, 4대강 살리기 문화예술인 공동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그의 시집으로는 '농토의 역사', '흙의 경전' 등이 있다.




이규성 기자 pe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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