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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스토리]북한산 둘레길<2>불온한 바람 그리고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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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 둘레길은 안내 표지판만 따라가면 지도 없이 쉽게 갈 수 있을 만큼 곳곳에 많이 설치돼 있다.

북한산 둘레길은 안내 표지판만 따라가면 지도 없이 쉽게 갈 수 있을 만큼 곳곳에 많이 설치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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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이규성 기자]오후 바람이 세졌다. 풍경소리가 들렸다. 오르막 비탈, 절집 처마에서 울리는 소리다. 다시 소리가 희미해질 즈음 솔밭 한 가운데로 한 무리의 사람들이 올라온다. 무리는 자주 둘레길을 걸어온 듯 잰 걸음을 한다. 웃고, 떠들고 다들 신 난 표정이다. 연신내나 불광동쯤의 어느 공장에서 왔는지...무리 중에 청색 작업복을 입은 이도 있고 등산복을 잘 갖춰 입은 이도 있다.


"어서 구기동 가서 막걸리 마시자"며 서로를 격려하고 재촉하는 소리가 정겹다.옛성길을 넘으려면 두어시간. 그들의 즐거운 회식자리가 눈에 선하다. 구름 위의 다리 '스카이 워크'. 그들이 다 지나가기를 기다린다. 다리 아래 은평 시내가 햇살에 반짝인다. 구름다리를 지나면 둘레길은 불광동 주택가로 접어든다. 3,4층 규모의 다가구주택, 낮은 단독주택들이 서로 이마를 맞대고 늘어선 광경이 평창마을 길과는 딴판이다.
길가의 전봇대에는 '전셋집 구함', '월세 60만원' 등 세입자를 구하는 홍보물들이 여기저기 붙어 있다. '아파트 31평, 실입주금 1억900만원'이라는 네모진 플래카드도 펄럭댄다. "도무지 어떤 집인지 궁금하다." 강남에선 30여평이면 10억원에 넘어간다. 소규모 다세대주택일 터다. 최근 하우스 푸어들이 집을 잃을 처지에 놓였다고 신음소리가 가득하다. 집은 고통의 뿌리다. 또 빚의 다른 이름이다. '집=빚'에 사로잡혀 인생을 저당 잡히고 금융 노예로 살아가는 사람이 수두룩하다. 그래도 집은 지어지고 또 팔겠다고 아우성인 세상은 참으로 많은 표정을 지녔다.

수업을 마친 아이들의 하굣길과 둘레길이 잠시 겹치는가 싶더니 소로로 이어진다. 평탄하고 아늑한 뒷동산길이다. 여기서 길은 뉴타운과 산기슭 사이로 흘러 저만치 치달아간다. 상수리나무, 밤나무 등 잎을 떨군 활엽수 아래 길섶의 진달래가 눈에 들어온다. '앗 ! 분명 이른 봄의 꽃망울인데...' 부풀은 모양새가 놀랍다. 잠시 계절을 잊었나보다. 진달래가 당할 시련이 안쓰럽다.

기자촌은 1969년 언론인을 위한 주택 420여가구가 들어선 곳으로 2004년 은평뉴타운 사업구역으로 지정됐다.

기자촌은 1969년 언론인을 위한 주택 420여가구가 들어선 곳으로 2004년 은평뉴타운 사업구역으로 지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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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평 뉴타운, 지금의 대통령이 서울시장이던 시절 '살기좋은 도시를 만들겠다'고 시작한 도심 재개발의 일환인 뉴타운사업의 첫 작품이다. 그는 삽질을 다 완료하지도 않은 채 권좌에 올랐다. 이곳은 예전엔 '기자촌'이라고 불렸다. 1969년 박정희 정권은 무주택기자들에게 공영개발을 통해 수십여평 규모의 땅을 쪼개 헐값에 제공했다. 기자들은 집과 동시에 '보도지침'도 함께 받았다. 그 결과 기자들은 오랫동안 침묵하거나 독재에 편승, 권력의 시녀가 됐다. 공무원이나 직업군인을 위한 주택단지를 개발한 사례는 있었지만 특정직업인인 '기자'들에게 집이 제공된 것은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예를 찾기 어렵다.그러나 마을은 워낙 급조된 탓에 버스도 다니지 않고 편의시설도 없었다. 기자들은 서둘러 마을을 뛰쳐 나와 다른 곳으로 흩어졌다. 떠날 때 그들의 주머니는 얼마간 불려져 있었다.
40여년 후 게딱지처럼 다닥다닥 연이어져 있던 단층짜리 슬라브 집이나 슬레이트집들은 다 사라졌다. 거대한 공사판이 펼쳐져 서글픈 역사가 인멸되는 동안 본래 살던 이들도 떠났다. 대신 투기꾼들과 건설업자, 땅을 많이 가진 이들이 거대한 잔치를 벌였다. 은평뉴타운은 야심찬 의욕에도 불구하고 고분양가 논란, 미분양, 베드타운, 투기 열풍, 원주민 재정착률 미흡 등으로 지금껏 몸살을 앓고 있다. 문제는 또 있다. 서울시는 미분양을 해소해 수천억원의 혈세를 여전히 회수하지 못 했다. 최대 2억2000만원까지 할인 분양중인 아파트도 남아 있다. 일부는 임대주택 및 대학생 기숙사로 쓰여진다.

구름정원길, 마실길 일대에서 은평뉴타운만이 불온한 정치의 유산인 것은 아니다.'위대한 성군' 세종의 넷째 아들인 금성대군의 사당인 '금성당', 서자인 화의군의 무덤인 '화의군 묘역'도 몰려 있다.이들은 형제인 세조에게 죽임을 당해 은평에서 기려지고 있다.

고려 때 창건된 진관사는 집현전 학사들이 안식년 동안 머물며 공부하던 곳으로 6.25 때 소실됐다 재건됐다.

고려 때 창건된 진관사는 집현전 학사들이 안식년 동안 머물며 공부하던 곳으로 6.25 때 소실됐다 재건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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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온함은 진관사계곡에서도 엿볼 수 있다. 진관사는 고려 때 창건돼 6.25 당시 화재로 소실됐다가 재건됐다. 조선조 세종 당시엔 독서당이 있어 집현전 학사들이 안식년 휴가동안 학문을 정진한 곳이기도 하다. 아직까지 독서당이 있던 자리는 찾지 못 하고 있다. 지금의 진관사는 '템플스테이'와 '사찰 음식연구'로 유명하다. 은평 뉴타운 건설 당시 진관사계곡에 들어서 있던 무허가 식당 수십여 채가 모두 철거됐다. 무허가 식당들은 보상금도 제대로 못 받고 인근 일영이나 벽제 등의 유원지로 흩어졌다. 지금 울창한 송림 사이 맑은 개울가에 징글맞게 삶을 꾸렸던 이들의 흔적은 없다. 그것이 파묻고, 헤치고, 들쑤셔진 공사판을 봐야만 변화라고 믿는 사람에게야 업적이라고 거품 물 자랑거리인지는 모르겠다.

워낙 급조된 탓에 편의시설을 갖추지 못했던 기자촌은 지금은 사라진 옛 154번 버스 종점이기도 했다.

워낙 급조된 탓에 편의시설을 갖추지 못했던 기자촌은 지금은 사라진 옛 154번 버스 종점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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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당이 사라져 허기를 달랠 길 없다고 아쉬워 마라. 개울 건너 구부러진 오솔길과 개울을 지나면 묵밥집이 나오고 한참을 더 가면 정겨운 밥집들이 있다. 여느 유원지 풍경처럼 족구장도 보이고 등나무 벤치도 보인다. 거기서 파전에 막걸리 한잔 걸치면 부러울게 없다. 다리쉼을 할만한 장소다. 그새 붉은 노을이 서쪽 하늘을 물들여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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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성 기자 pe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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