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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업성장史]<26>해방직후 바빠진 은행·국책 회사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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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조흥은행이 중앙은행 될 뻔 했는데..
정운용 조흥은행장. 美 고든 재무부장 친분에 '적산(敵産)' 업무 따내
조선·조선식산은행과 '현 한은 모체' 3파전..은행장 교체되며 꿈 접어


1945년 8월14일. 해방 하루 전인 이날 서울 시내의 각 전봇대와 담벼락에는 난데없이 붓글씨로 쓴 흰 벽보가 나붙었다. 다음날인 15일 정오에 일본 천황의 중대 방송이 있을 거라는 내용이었다. 일본이 패망하리라고는 꿈도 꿔보지 못했던 시민은 벽보를 보면서 중얼거렸다. 이제는 전 국민에게 죽창이라도 들고 총공격에 나서라는 명령이라도 선포하는 모양이라고 저마다 수군거렸다.
이윽고 이튿날 정오가 되자 전날 벽보에서 밝힌 대로 약간 떨리는 듯한 일본 천황의 목소리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잡음이 심해 잘 들리지는 않았지만 놀랍게도 일본이 무조건 항복한다는 벼락같은 선언이었다.

조흥은행 본점

조흥은행 본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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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적 황군이라며 그렇게도 떠들어대던 일본이 이렇듯 허무하게 망하고 말다니. 시민은 잠시 어리둥절해 할 말을 잃었다. 이날 오후 서울 시내는 알 수 없는 적막 속에 빠져 있었다.

그러나 다음날 오후가 되자 상황이 돌변했다. 반응이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지긋지긋한 식민 지배의 사슬을 비로소 끊게 됐다는 사실이 확인되면서 저마다 거리로 뛰쳐나왔다. 절로 솟구치는 감격의 기쁨을 억누를 길이 없어 거리마다 환희의 물결을 이뤘다.
같은 시간 일본 천황의 항복 선언 방송이 있는 직후 조선총독부 제1회의실에선 간단한 식전 행사가 있었다. 식전 행사가 끝난 후 조선총독부를 비롯한 모든 주요 관청이 가장 먼저 손을 댄 작업은 중요 문서의 소각이었다.

조선식산은행

조선식산은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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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음으로 조선총독부가 한 일은 '조선은행권'. 우리의 돈을 무한정 찍어내어 남발하는 일이었다. 한 달 전인 7월까지만 해도 47억원이던 전체 통화 발행액은 8월 들어 갑자기 80억원으로 불과 한 달 사이에 거의 2배로 늘어나고 만 것이다. 이같이 통화를 무차별 남발한 돈은 각급 관ㆍ공사를 비롯한 국책회사 직원들의 퇴직금, 70여 만명에 달하는 재선(在鮮) 일본인들의 귀국 경비로 무차별 지급됐다. 이 때문에 조선은 심각한 인플레에 빠져들었다. 8월에 1100원하던 쌀 한 가마 값이 이듬해 8월에는 4700원으로 무려 4배나 껑충 뛰어올랐다.

한편 조선총독이었던 아베는 점령군 사령관 하지 중장의 지시로 9월19일 서울을 은밀히 빠져나갔다. 정무총감 엔도는 아놀드 군정장관의 지시로 미군정청 고문을 하다가 10월17일 서울을 빠져나갔다. 재무국장 미즈타는 해방 직후 통화ㆍ재정 문제로 잠시 검사국의 조사를 받다가 역시 귀국했다. 악명 높은 일본 경찰의 총수였던 니시히로 경무국장은 해방 전후 기밀비의 용도에 관해서 미 헌병대에 잠깐 억류돼 조사를 받은 후, 미 헌병대의 호송으로 부산항 연락선에 실려져 점잖게 일본으로 추방(?)됐다. 이로써 반세기에 걸친 일본의 잔혹한 침략사는 그만 시나브로 끝이 나고 말았다.

그렇다면 반세기여 만에 빼앗긴 고토를 되찾은 우리의 기업들 또한 그 같은 해방의 기쁨에 마냥 들떠있기만 했던 것일까? 행방 공간이라는 새로운 전환기 속에서 우리 기업들의 운명은 과연 어떻게 서로 엇갈려갔던 것일까? 우선 1896년 이 땅에 처음으로 은행이 탄생한 이래 해방 직전까지도 유일하게 살아남았던 조흥은행(지금의 신한은행)의 풍경부터 만나보기로 하자.

조선은행

조선은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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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이튿날 청계천변 광교에 자리한 조흥은행 본점엔 일본인 행원들이 거의 출근하지 않았다. 일본인 중역 가운데 누군가가 할복 자결했다는 소문이 나도는 가운데 한국인 행원들만이 출근해서 이야기꽃을 피웠으나 은행 업무는 사실상 완전히 마비된 상태였다.

그렇게 한낮이 됐다. 그때 갑자기 거리에서 만세소리와 함성이 들려왔다. 벼락같이 찾아온 갑작스러운 해방에 잠깐 어리둥절했던 시민이 마침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군중의 선두엔 서대문형무소에서 방금 풀려난 듯한 흰 한복 차림의 인사들이 나섰다. 실로 감격스러운 장면이었다.

미군이 서울에 진주한 것은 그보다 한참 뒤인 9월 8일경이었다. 조흥은행 본점에도 미군 5명이 일주일 정도 주둔했다. 9월20일에는 미군 환영 행사가 서울의 거리에서 대대적으로 열렸다. 조흥은행에서도 100여명이 선발돼 남자 행원들은 흰 와이셔츠를, 여자 행원들은 한복 차림으로 '웰컴(WELCOME)'이라고 쓴 플래카드를 든 채 시민의 환호 속에 시가행진을 벌였다.

해방 직후 조흥은행이 수행한 가장 이색적인 업무는 특수업무부의 '적산(敵産)' 관리였다. 일본인들이 떠나면서 남기고 간 재산인 적산을 관리, 감정해 팔아넘기는 일이었다. 당시 적산 불하란 거저줍다시피 하는 것으로 오늘날의 복권 당첨과도 같은 횡재가 아닐 수 없었다. 때문에 적산을 차지하려는 사람들로 조흥은행 본점의 특수업무부 앞은 연일 인산인해를 이뤘다.

그러나 이 무렵 주요 관심사는 과연 어느 은행이 중앙은행으로 낙점을 받을 것이냐에 온통 쏠려있었다. 조흥은행 역시 조선은행과 조선식산은행(지금의 산업은행)과의 치열한 삼파전에 뛰어든 상태였다. 물론 조선은행은 발권과 국고업무 등을 담당하고 있는 조선은행이 마땅히 중앙은행의 모체가 돼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상황은 여의치가 않았다. 그동안 조선은행이 일본의 대륙 침략에 일익을 담당하면서 한반도보다는 주로 만주와 중국에서 활약했으며 상업은행의 업무도 함께 수행하고 있다는 것이 문제였다.

조선식산은행은 대륙 침략의 도구였던 조선은행보다는 주로 조선 안에서 활약한 조선식산은행이 당연히 중앙은행의 모체가 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조흥은행 또한 '조선은행은 일본이 세운 식민지 은행이다. 일제하에서 우리 민족자본에 의해 세워지고 우리 민족의 손으로 키워온 은행은 오로지 조흥은행 밖에 없다'며 그 당위성을 역설하고 나섰다.

해방 직후 금융계를 좌지우지하던 곳은 미군정청의 재무부였다. 그리고 일본인 중역들이 떠나간 이후 새로이 조흥은행장에 오른 이는 정운용이었다. 한데 정 행장은 당시 미군정청의 고든 재무부장과 매우 절친한 사이였다. 정 행장의 청이라면 고든 재무부장은 웬만하면 다 들어줬다. 국책은행인 조선은행이나 조선식산은행이 아닌 민간은행이었던 조흥은행이 적산관리 업무를 맡을 수 있었던 것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였다. 조흥은행으로선 비장의 카드를 쥐고 있었던 셈이다.

그러나 고든 재무부장이 본국으로 소환되고 윤호병이 새 재무부장이 되면서 조흥은행장도 김한규로 교체됐다. 해방이라는 새로운 전환기 속에서 중앙은행의 모체가 되려는 조흥은행의 노력도 그것으로 끝나고 말았다.

다음으로 살펴볼 곳은 일제강점기 최대 규모의 국책회사였던 조선미곡창고주식회사(이하 미창)와 조선운송주식회사(조운)의 풍경이다. 회사가 보유한 창고 면적만 무려 10만평에 달해 한국에서 가장 거대한 건축물을 보유하고 있었던 미창과 지금 돈으로 자본금 약 4조6200억원에 종업원 수 5만여명을 헤아리는 조운의 해방 직후 운명은 그러나 해방의 감격과는 정반대의 것이었다. 혹독한 고난 속에 스스로 일어서지 않으면 안 됐다.

먼저 미창은 일본의 항복 소식이 전해진 바로 그 날 오후 본사 조선인 간부들과 직원 대표들은 긴급회의를 열고 초대 사장으로 왕희필을 선임했다. 회사 경영에 잠시라도 공백이 생기는 것을 막기 위한 긴급 조치였다.

당시 미창의 주식은 조선은행 등 금융권과 일본 국영기업인 식량영단이 소유하고 있었다. 특히 일본의 식량영단은 전체 주식의 80%를 갖고 있어 해방 이전부터 미창의 경영에 많은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따라서 신임 사장단은 일본인 임원들을 비롯해 대주주인 식량영단과 은행 관계자들을 만나 회사 인수 절차에 들어가는 한편 조직을 쇄신하고 나섰다. 업무 중단으로 말미암아 거의 끊기다시피 한 영업 수익을 회복해 회사 경영을 한시라도 정상화시키기 위함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효자 노릇을 톡톡히 한 곳이 바로 인천지점이었다. 인천항에 상륙하는 미군의 군수품과 긴급 구호물자 하역을 비롯해 북한 지역과 중국 등지에서 들어오는 화물 취급 등을 통해 어느 정도 수입이 확보되면서, 덕분에 미창은 해방 직후 직면했던 경영 위기를 재빨리 극복할 수 있었다.

그러던 10월 5일 미군정청은 식량 수급 정책과 관련해 식량 통제를 철폐하고 모든 양곡은 자유시장 거래로 환원한다고 발표했다. 이와 함께 미군정청은 미창을 일본의 적산기업으로 간주하고 관리관을 파견시켜 회사 경영을 지휘 감독하기 시작했다.

이때까지도 미창은 식량영단과 함께 미군정청 농림부 관장 아래에 묶여있었다. 한데 미창의 대주주인 식량영단이 소유 지분을 내세워 다양한 경로를 통해 미창을 흡수하려고 나서면서부터 둘 사이에는 갈등이 끊이지 않았다.

미창의 경영진은 미군정청에 미창의 존립 근거와 향후 기능에 대해 수차례 설명하는 등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효과가 미비하자 이듬해 4월에는 해방 이후 최초로 전국 지점장 회의를 소집했다. 전사적인 반대 투쟁을 전개해나간 끝에 마침내 식량영단의 흡수 기도를 좌절시키는데 성공했다.

한편 조운은 해방 이틀 뒤인 8월17일 오전에야 서울역 앞 본사에서 조운 직원 대표들이 첫 모임을 가질 수 있었다. 이 날 조운 직원 대표들은 전국에 산재한 회사의 자산을 파악해 보호하는 한편 임직원 전체의 의사를 대변할 임시 기구로 조운유지준비위원회(이하 유지위)를 결성하고 위원장에 황한철, 부위원장에 장봉의와 이재순을 선임했다.

이어 유지위는 부문별로 담당할 업무와 목표를 정한 다음 전체 주식의 80%를 소유하고 있는 일본인 대주주들을 만나 회사 인수 절차에 대해 합의했다. 또 이 과정에서 전국 철도역과 항구에 산재한 943개 점소의 모든 업무와 5만여 종업원을 접수하는데도 성공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조운의 모든 조선인 임직원들은 머지않아 독립된 국가가 건설될 것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그 새로운 나라에서 조운은 국가경제 발전을 앞장서 이끌어 나가게 될 것이라고 누구도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해방 직후 조운에게 모든 게 다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다. 해방 직전까지만 해도 만주와 중국으로 떠나는 화물들이 산더미처럼 밀려드는 바람에 어느 하루 운송전쟁을 치르지 않은 날이 없을 만큼 바쁜 나날을 보내야 했다. 한데 불과 며칠 사이에 대륙으로 떠나던 화물열차도, 전국의 도로를 누비던 화물차 행렬도 마치 마술이라도 걸리고만 듯 한순간에 그만 멈춰버렸다. 급기야 9월 11일에는 서울에서 신의주로 향하는 경의선 열차를 마지막으로 남북을 종단하는 열차의 운행마저 일제히 중단되고 말았다.

대부분의 회사 수입이 철도와 연계한 화물 운송에서 나오는 조운의 영업 구조상, 이러한 열차 운행 중단은 당장 회사의 생존을 위협했다. 해방되던 해 연말 조운의 운송 취급 실적은 전년 대비 발송량이 96%를, 도착량은 98%나 감소한 수준이었다. 다시 말해 조운은 그대로 남아 있는데 그러한 조운이 해야 할 일은 한순간에 사라져버린 것이었다.

도로 운송 쪽도 상황이 나쁘긴 마찬가지였다. 해방 이태 전만 해도 조운은 전국 주요 철도역과 항만의 합동운송회사를 인수해 국내 화물자동차의 절반 이상을 보유하고 있었다. 전국 어디를 가나 조운의 고유 번호를 단 트럭이 대부분이었던 것이다.

한데 1944년 총독부가 조선화물자동차통제(주)를 설립할 당시 조운의 일본인 경영진이 조선에서 운행되고 있던 화물자동차 1600여대 가운데 절반 이상인 1000여대를 현물로 출자해버리면서 해방 직후 회사 소유의 화물자동차는 서울 시내 운송용으로 남겨둔 고작 30여대가 전부였다. 가뜩이나 물동량이 줄어든 마당에 당장 운행이 가능한 화물차량마저 몇 대 안 되다보니 정상적인 영업이 이루어질 리 만무했다.

그런데다 해방 전만 해도 철도 운송이나 항만 하역 등이 일체 조운으로 일원화돼 있던 체제마저 위협받고 있었다. 미군정청이 들어서면서 항만 하역에 대해 통제하지 않았고, 그 결과 전국의 항만마다 군소 하역업체들이 우후죽순처럼 난립하기 시작해 혼란이 극에 달했다.

최초로 해외 진출까지 시도했던 국내 최대 민간기업 김연수의 경성방직㈜ 또한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일본의 패망과 함께 만주에서 붕괴하고 만 김연수를 고국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착취계급 물러나라"는 노동자들의 격렬한 농성이었다. 그에게 유일하게 남은 경방 양평동 공장과 영등포 공장은 이미 좌익 노동단체인 전국노동조합평의회의 사주를 받은 주동자들에 의해 점령당한 뒤였다. 김연수가 그들을 향해 외쳤다.

"자네들은 나를 착취자라고 하지만 내가 무얼 어떻게 착취했는지 말해보라. 나는 오늘까지 한 사람이라도 더 일을 시키고, 한 푼이라도 더 주려고 했어. 그렇지만 나는 경성방직 20여년 동안 회사 돈은 한 푼도 가져다쓰지 않았네. 누가 누구를 착취했다는 건가, 이 사람들아!"

결국 김연수는 사장직을 내놓고 경방을 떠나야만 했다. 해방 정국의 혼돈 속에 그야말로 우리 경제는 한 치 앞을 내다보기 어려웠다.



박상하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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