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Dim영역

[한국기업성장史]<24>8·15 해방 전, 막 걸음마를 시작한 10대 그룹의 풍경(上)

스크랩 글자크기

글자크기 설정

닫기
인쇄 RSS
작가 박상하가 쓰는 재계 通史
위기맞은 협동정미소, 운송사업으로 질주를 시작하다

-대륙여행하며 새 사업 구상
-삼성상회 열어 건어물 등 수출
-조선양조도 인수 고액납세자 등극
-24살 점원 정주영, 쌀가게 인수
-쌀배급제 실시로 눈물의 폐업
-현대차 모태 아도서비스로 새출발


▲이병철은 1938년 자본금 3만원(지금 돈 약 36억원) 규모의 상점을 대구에 열었다. 대구와 포항 일대에서 생산되는 청과물과 건어물을 만주에 수출하는, 오늘날 삼성그룹의 모태가 되는 삼성상회였다.

▲이병철은 1938년 자본금 3만원(지금 돈 약 36억원) 규모의 상점을 대구에 열었다. 대구와 포항 일대에서 생산되는 청과물과 건어물을 만주에 수출하는, 오늘날 삼성그룹의 모태가 되는 삼성상회였다.

AD
원본보기 아이콘

한국 제1의 기업가 김연수의 경성방직이 학습과 단련을 통해 일본의 대기업들과 견줄만한 성장 속에 최초로 해외 진출에까지 나서 승승장구했지만 1945년 일제의 패망과 함께 허무하게 붕괴되고 말았다. 경방의 붕괴는 곧 한국 산업 1세대의 종식을 뜻했다.

하지만 나라마저 빼앗기고 만 절망의 시대에 놀랍게도 소설가 춘원(春園) 이광수는 우리의 미래를 확신하고 있었던 듯하다. 1935년 4월14일자 조선일보의 '실업과 정신수양'이란 기고문에서 '…경성방직의 확장ㆍ발전은 결코 한낱 사실만이 아니요. 뒤에 오는 대군(大軍)의 척후(斥候)임이 확실하다'며 훗날 만개할 한국 자본주의를 감지하고 예언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김연수의 경방은 척후에 지나지 않을 뿐 그 '뒤에 오는 대군'이란 도대체 누구를 일컬은 것이었을까. 1945년 8ㆍ15 해방 전 그들은 과연 어떤 모습으로 어디쯤 오고 있었던 것일까.

이병철은 해방을 맞이하기 이미 10여 년 전부터 부단히 사업을 벌여온 터였다. 학교 공부에는 그다지 흥미를 느끼지 못하였으나 비교적 조숙한 편이었던 그는 일본 와세다대학 전문부 정치경제학과를 중퇴한 뒤 돌아와 26세이던 1936년 마산에서 정미업을 시작으로 재계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쌀 6백 가마쯤 나는 토지만으로는 사업 자금이 턱없이 모자랐다. 자금을 좀 더 끌어 모으지 않으면 안 되었다. 결국 지인 둘을 만나 세 사람이 1만원(지금 돈 약 12억원)씩을 투자해 협동정미소를 시작했다.

그러나 당초 목표로 삼았던 마산에서 가장 규모가 큰 정미소를 만드는 데는 합자금 3만원으론 부족했다. 이병철은 은행 융자를 얻기로 하고 조선식산은행 마산지점 일본인 지점장을 찾았다.

담보도 충분하고 사업 계획도 하자가 없었기 때문에 크게 어려울 것이 없을 줄 알았다. 한데 일본인 지점장은 여러 가지 질문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곡물 가격이 변동하고 있는 원인이 무엇인지, 일본 곡물시장의 동향을 어떻게 보는지 하는 따위였다. 마치 시험을 치르는 것 같아 불쾌하기도 했으나, 이병철은 꾹 참고서 아는 대로 성실하게 답변했다.

그러자 일본인 지점장은 대단히 만족스런 표정을 지었다. 융자를 약속한 것이다. 이병철의 첫 사업은 이렇듯 지인들을 끌어들여 부족한 자금을 늘리고, 은행 융자를 더해 마침내 실현될 수 있었다.

하지만 정미사업은 생각보다 단순했다. 그 한계 또한 너무나 뚜렷했다. 당시 곡물 가격은 인천에 자리한 미곡거래소에서 결정되었는데, 서울 등 큰 도시에선 인천의 시세를 내다보면서 거래하는 업자간의 신용 선물 거래가 성행했다. 경험이 일천한 이병철은 그런 외부 환경에 눈을 돌리지 못한 채 그저 도정 기계가 멈추지 않도록 미곡을 확보하는 데에만 전력을 다했다. 그 결과 1년여 동안에 자본의 3분지 2를 잠식하고 말았다.

이쯤 되자 동업자들이 해산을 종용하고 나섰다. 이병철은 그런 지인들을 설득시켜 해산의 위기를 무마한 뒤 손해 부분에 대한 원인 분석에 들어갔다.

그리고 이듬해엔 전술을 정반대로 바꾸어 나갔다. 그러한 전술은 보기 좋게 적중했고, 상당한 이익을 올릴 수 있었다. 적자를 면하고 적지 않은 이익까지 냈음에도, 도정 사업의 한계 또한 확인했다. 이병철은 당장 도정 이외에 다른 것에도 눈을 돌려야 했다.

당시 마산에서는 물자 운송 수단이 크게 부족했다. 우마차로는 더디어 시간이 많이 소요되었고, 트럭 운임은 너무나 비싸서 엄두를 내지 못하는 실정이었다.

이병철과 지인들은 그러한 점에 주목했다. 자신들의 협동정미소 쌀을 안정적으로 운송하는 것은 물론, 다른 물자도 운송하는 독립된 운송 사업을 해보는 것도 괜찮겠다고 생각했다.

때마침 일본인이 경영하던 마산 일출자동차회사가 매물로 나와 있었다. 그들은 트럭 10대를 보유하고 있던 이 회사를 인수하는 한편 새 트럭 10대를 더해 도합 20대의 트럭을 가진 운송회사를 경영케 되었다. 당시 트럭 1대 값이 요즘의 비행기 1대 값과 맞먹는 것이어서 실로 모험에 가까운 대규모 투자가 아닐 수 없었다.

그의 생각은 옳았다. 정미소와 운송회사가 상호 보완 작용을 하며 엄청난 시너지 효과를 낳았던 것이다.

이때부터는 실로 기고만장해도 좋을 만큼 사업이 술술 잘 풀려나갔다. 미처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많은 돈을 벌어들였다.

그러면서 세 번째 사업으로 토지를 사들이기 시작했다. 미곡을 거래하기 시작하면서 지가 동향에도 자연스레 관심을 가졌다.

당시의 토지 가격은 평당 25전. 논 200평 한 마지기의 쌀 생산량은 15원 수준이었는데 여기서 관리비 1원, 지세 1원, 기타 잡비 1원을 뺀 실수입은 12원 정도였다. 따라서 지가가 50원 나가는 논 한 마지기에서 은행 이자 연 7분3리의 3원65전을 공제한다 해도, 투자액의 16%인 8원35전씩의 연간 순수익을 얻게 되는 셈이었다.

이병철은 김해평야에서 경작이 가능한 전답은 한 평도 남김없이 모조리 사들이기로 작정하고, 매물로 나와 있는 토지를 조사했다. 때마침 40만평의 논을 처분하려는 일본인이 있다는 소식을 듣자, 곧바로 계약을 체결하고 착수금으로 우선 1만원을 지불했다.

이튿날 이병철은 조선식산은행 마산지점을 찾았다. 은행의 감정 결과 평당 38전이 나왔다. 따라서 전체 80% 수준인 평당 27전, 총액으로는 11만원을 융자받을 수 있었다. 은행 융자만으로 토지 매입 대금을 전액 지불하고도 돈이 남았다. 그야말로 땅 짚고 헤엄치기였다.

그렇게 한 해가 지나자 이병철은 200만평의 대지주가 되어 있었다. 가을 추수가 끝나면 소작료까지 한꺼번에 들어오게 되어 자금 사정조차 더욱 원활해졌다.

그러나 1937년 중일전쟁으로 말미암아 뜻하지 않은 사태가 발생했다. 총독부의 비상조치로 토지 담보 대출을 일체 중단한다는 통고가 날아든데 이어, 덩달아 토지 시세까지 폭락하기 시작했다.

결국 시가보다 토지를 싸게 팔 수 밖에 없었다. 뿐만 아니라 정미소와 운송회사까지 죄다 남의 손에 넘겨주고 나서야 겨우 부채를 청산할 수 있었다. 모든 것이 그만 한순간에 원점으로 되돌아가고 말았던 것이다.

그렇대도 실의에 빠져있기에는 너무나 젊은 나이였다. 이병철은 새 출발을 다짐하면서 새로운 사업 구상을 위해 장거리 기차여행에 올랐다. 서울, 평양, 신의주에 이어 창춘, 펑텐 등 만주의 여러 도시를 거쳐 베이징, 칭다오, 상하이에 이르는 기나긴 여행길을 계속했다.

이윽고 머나먼 대륙여행에서 돌아온 이병철은 1938년 자본금 3만원(지금 돈 약 36억원) 규모의 상점을 대구에 열었다. 대구와 포항 일대에서 생산되는 청과물과 건어물을 만주에 수출하는, 오늘날 삼성그룹의 모태가 되는 삼성상회였다.

그리고 1년여가 지나 어느 정도 자리를 잡으면서 자금의 여유가 생기자, 무언가 새로운 투자 대상을 찾게 되었다. 그러다 마산에서 실패한 쓰라린 전철을 다시 밟지 않기 위해서라도 판매만을 고집할 것이 아니라 제조를 겸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때마침 대구에 일본인이 경영하던 청주 양조장 조선양조㈜가 매물로 나와 있었다. 대구에서 첫째, 둘째를 다툰다는 규모였기 때문에 매입가만 무려 10만원(지금돈 약 120억원)을 호가하였으나, 이병철은 두 말 않고 인수했다. 그러면서 어느덧 대구에서도 알아주는 굴지의 고액 납세자로 부상해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하지만 1941년 태평양전쟁 발발 이후 점차 일본인 관료들마저 곤경을 호소하는 절박한 상황들을 지켜보며, 일본의 패망을 확신한 이병철은 대구 근교에 1만평 남짓한 과수원을 사서 닥쳐올 식량난에 대비했다. 그런 다음 대구에 벌여놓은 삼성상회와 조선양조㈜의 경영 일체를 관리인에게 맡긴 뒤 낙향의 길을 택했다. 머지않아 도래할 새로운 세상을 맞이하기 위한 칩거에 들어갔던 것이다. 8 ㆍ15 해방 전 이병철(당시 35세)은 경북 의령의 고향 집에 머물고 있었다.

한편 찢어지게 가난한 농촌 생활이 싫어 20살 때 무작정 상경한 정주영은 지금의 고려대학교 신축 공사장에서 막노동을 하며 경성에 정착할 수 있었다. 이어 용산역 근처에 자리한 풍전엿공장(지금의 동양제과)에 잔심부름꾼으로 들어갔으나 장래가 보이지 않자 다시금 경성 거리를 쏘다녔다. 쌀가게 복흥상회의 배달원으로 취직하게 된 것은 그에게 곧 행운이었다. 점심과 저녁을 먹여주고 월급으로 쌀 한가마 씩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버지로부터 부지런함을 물려받은 정주영은 전심전력을 다했고, 2년 뒤에는 게으른 난봉꾼 아들 때문에 골머리를 앓던 쌀가게 주인으로부터 쌀가게를 인수받으라는 뜻밖의 제의를 받았다. 하지만 가진 거라곤 불알 두 쪽 뿐이었던 정주영은 단골을 그대로 물려받고, 쌀값은 월말에 계산한다는 정미소의 약속을 받아낸 뒤에야 비로소 사글세로 쌀가게를 인수할 수 있었다. 이때 그의 나이 24살이던 1938년이었다.

그러나 좋은 일에는 으레 나쁜 일도 끼어들기 마련이다. 중일전쟁 이후 전시체제 속에 갑자기 쌀 배급제가 실시되면서 전국의 쌀가게가 일제히 문을 닫아야 했다. 정주영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그러면서 수중에 가진 돈 700~800원(지금 돈 약 9000만원)쯤 되는 종잣돈으로 뭔가 할 만한 사업이 없을까 궁리하던 중 평소 알고 지내던 엔진 기술자 이을학으로부터 자동차 수리 공장을 인수하면 어떻겠느냐는 제의를 받았다. 정주영이 수중에 있던 돈에다 쌀가게를 할 때 신용을 쌓아둔 사채업자에게서 빚을 얻어 새로이 시작한 사업이, 오늘날 현대차그룹의 모태가 되는 자동차 수리 공장 아도서비스였다.

새로운 일거리를 찾은 정주영은 밤잠도 자지 않으면서 신명나게 일했다. 이을학이 워낙 소문난 기술자라 손님들도 끊이지 않았다.

한데 잔금을 치른 지 닷새 만에 그만 불이 나 공장이 전소되고 말았다. 정주영은 또다시 사채업자를 찾아가 무릎을 꿇고 앉아 3500원이라는 적지 않은 사채를 다시금 빌려야만 했다.

그런 뒤 이번에는 신설동 근처에 빈 터를 얻어 무허가로 아도서비스를 다시 시작했다. 당시엔 허가를 받는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산더미 같은 빚 속에서, 그것도 무허가로 자동차 수리 공장을 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하루하루가 지옥 같았다. 걸핏하면 동대문경찰서에서 순사가 찾아와 당장 걷어치우지 않으면 잡아넣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한데도 포기할 줄을 몰랐다. 매일같이 이른 아침이면 동대문경찰서 곤도 보안계장 집을 찾아가 통사정을 했다. 그러길 한 달여. 마침내 보안계장이 두 손을 들었다. 대로변에서 공장이 보이지 않도록 판자로 울타리를 둘러친 다음 숨어서 하라고 눈감아준 것이다.

그 무렵 경성에는 자동차 수리 공장이 몇 군데 되지 않았다. 더구나 대부분의 자동차 수리 공장에선 별 고장이 아닌데도 마치 큰 고장이라도 난 것처럼 수리 기간을 부풀리고 길게 잡아서 바가지를 씌우곤 했다.

정주영은 그런 치사한 방법을 쓰지 않았다. 기간은 서둘러 단축해주되 대신 고가의 수리비를 청구하는 방법을 택했다. 자동차를 타는 사람들은 다소 수리비가 높더라도 빨리 고쳐주는 걸 더 원한다는데 착안한 것이다.

그의 착안은 옳았다. 정주영의 무허가 공장으로 고장 난 자동차들이 꾸역 꾸역 물려들었다. 그러면서 돈도 상당히 벌어들여 사채업자에게 빌린 돈도 모두 갚을 수 있었다.

그러나 시국은 여전히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급기야 일본은 태평양전쟁을 일으키면서 기업정비령을 내리게 되었다. 정주영의 아도서비스는 일진공작소로 강제 합병되고 말았다.

그 후 정주영은 잠시 운송 사업을 했다. 황해도 홀동금광에서 트럭에 광석을 싣고 평양까지 운송하는 하청 일이었다. 하지만 이익을 본 것도 손해를 입은 것도 없이, 2년여 정도가 지난 1945년 봄 관리책임자에게 그만 하청 계약을 넘겨주고 말았다. 그리고 석 달여 뒤, 정주영은 감격스런 8ㆍ15 해방을 맞이할 수 있었다.

박상하 작가



AD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함께 본 뉴스

새로보기

이슈 PICK

  • 어른들 싸움에도 대박 터진 뉴진스…신곡 '버블검' 500만뷰 돌파 하이브-민희진 갈등에도…'컴백' 뉴진스 새 앨범 재킷 공개 6년 만에 솔로 데뷔…(여자)아이들 우기, 앨범 선주문 50만장

    #국내이슈

  • 공습에 숨진 엄마 배에서 나온 기적의 아기…결국 숨졌다 때리고 던지고 휘두르고…난민 12명 뉴욕 한복판서 집단 난투극 美대학 ‘친팔 시위’ 격화…네타냐후 “반유대주의 폭동”

    #해외이슈

  • 고개 숙인 황선홍의 작심발언 "지금의 시스템이면 격차 더 벌어질 것" [포토] '벌써 여름?' [포토] 정교한 3D 프린팅의 세계

    #포토PICK

  • 1억 넘는 日도요타와 함께 등장한 김정은…"대북 제재 우회" 지적 신형 GV70 내달 출시…부분변경 디자인 공개 제네시스, 中서 '고성능 G80 EV 콘셉트카' 세계 최초 공개

    #CAR라이프

  • [뉴스속 인물]하이브에 반기 든 '뉴진스의 엄마' 민희진 [뉴스속 용어]뉴스페이스 신호탄, '초소형 군집위성' [뉴스속 용어]日 정치인 '야스쿠니신사' 집단 참배…한·중 항의

    #뉴스속OO

간격처리를 위한 class

많이 본 뉴스 !가장 많이 읽힌 뉴스를 제공합니다. 집계 기준에 따라 최대 3일 전 기사까지 제공될 수 있습니다.

top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