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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동시각] 수영장에 태풍이 불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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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김현정 기자] 미국이 국제 정치 무대에서 외교력을 발휘하기 위해 경제 제재의 칼을 휘두른 역사는 1807년 시작됐다. 토머스 제퍼슨 당시 미국 대통령이 영국과 프랑스의 간섭에 대항하기 위해 금수조치법(Embargo Act of 1807)을 발동했던 일이다. 프랑스와의 전쟁을 핑계 삼아 영국의 약탈이 계속되자 제퍼슨 대통령은 무역길을 막아버리겠다는 결정을 내린다. 재무부 장관을 비롯해 미국 내 경제적 타격을 우려하는 주변의 만류를 뿌리친 것은 영국과 프랑스에 최대한 손해를 끼치고야 말겠다는 각오와 계산이었다.


그러나 그는 본래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다. 미국이 빠진 남미 지역 수출 주도권을 영국이 잡아채면서 영국 수출이 늘어났고, 수입가격은 폭등해 밀무역이 성행했다. 오히려 미국 경제가 곤경에 빠지자 시민들은 관련법의 철자(Embargo)를 역순으로 두고 ‘잡아달라(O Grab Me)’고 외치며 항의했다. 금수조치법은 15개월만인 1809년 3월 폐지됐지만, 이를 계기로 1812년 전쟁이 초래된다. 그야말로 실패한 제재, 실패한 정책이다.

최근의 러시아 경제 제재 시나리오도 당시와 비슷한 양상이다. 제재 후 러시아와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중국을 향한 판로를 키우며 서방 연합을 비웃었고, 여파는 공급부족발(發) 인플레이션(물가급등)으로 비화됐다. 코로나19 대응을 위해 거침없이 풀린 유동성으로 부푼 수요와 맞물려 물가 급등세는 속도를 더하고 있다.


미국을 비롯한 주요국이 긴축의 ‘빅 스텝(big step)’을 밟자 금융시장 피라미드의 하단에 놓인 신흥국들은 투자금 이탈과 물가급등, 외환보유고 부족으로 기아상태를 겪는 중이다. 블룸버그 통신에 따르면 올해 2분기 한국, 대만, 인도,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필리핀, 태국 등 7개국에서 빠져나간 외국인 자금은 400억달러(약 51조8200억원)에 달한다. 인플레에 대응하려는 미국의 금리인상으로 채권매도가 잇따르면서다. 2008년 세계 금융위기 당시에도 이 정도 자금이탈은 없었다고 한다.


투자의 귀재 워렌 버핏은 "수영장에 물이 빠지면 누가 벌거벗고 수영했는지 알 수 있다"고 했다. 경제 호황기를 지나 악재가 터져나오는 시장에서야말로 기업과 투자자의 진가를 알 수 있다는 의미다. 장기간 이어진 주식 불장이 끝나고 최근 약세장이 거듭되는 상황에서 여러 사람이 떠올리는 투자명언 중 하나 일 것이다.

그러나 2022년 글로벌 수영장의 물은 곱게 빠지지 않을 모양새다. 시각을 조금 바꿔 비유하자면 태풍과 거대 소용돌이가 휘몰아치는 수영장이다. 기축통화국이자 산유국인 미국은 산소마스크와 구명조끼를 완비해 잠영 준비를 마친 수영선수와 같다. 물이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버틸 수 있다. 물론 많은 미국인들 역시 인플레이션에 고통받고 있지만 체제 붕괴를 걱정해야 하는 처지까지는 아니다.


같은 시간 저금리에 이리 저리 차관을 얻어 쓰고, 입고 먹는 것 대부분을 수입에 의존하며 정치적으로는 어떠한 결단도 내리기 힘들었던 수많은 신흥국들은 벌거벗은 수영선수가 돼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다. 채무불이행(디폴트)과 정치적 불안에 앞서 정전, 대중교통 마비, 식재료 부족이 일상에 들이닥쳤다. 문제는 수영장의 태풍이 여기서 그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김현정 기자 alphag@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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